아이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내게 가장 많이 찾아온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한 편의 글을 완성해내는 아이들의 집요함에 놀랐고, 생각지도 못했던 참신한 아이디어로 글을 쓰는 능력에 놀랐고, 날이 갈수록 완성도 있는 글을 향해가는 그 깊이에 놀랐다. 이런 놀라움이 경이로움으로 이어진 것은 아이들이 ‘외딴방’에서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홀로 구석진 방에 틀어박혀 앉아 우울 속에서 살던 이들이 글을 쓰면서 서로의 감정을 나누고,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정말 경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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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들과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앞장서서 방향을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들이 선택한 길로 함께 들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러다 막다른 길 앞에 서면 “이 길이 아닌가 봐~” 하며 웃으면서 함께 되돌아 나오고 싶다. 그 길을 나오면서 우리가 걸었던 길에서 봤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 순간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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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처참한 결과 앞에서 아이들은 깨닫는다. 내가 표현한 것을 다른 사람이 얼마나 이해하지 못하는지, 내 글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그러나 아이들은 낙담하지 않는다. 나만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 옆에 있는 얘도, 저기 있는 쟤도 다 나와 똑같다는 걸 위안 삼는다. 이게 중요하다. 나만 글을 못 쓰는 게 아니라는 것, 나와 같은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걸 깨닫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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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필명을 지어주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은 서로에게 관심 없는 척하지만, 사실은 서로를 향한 안테나를 길게 뽑아두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단어를 이토록 잘 찾아낼 수가 없다. (…) 아이들은 자신의 필명도 그렇지만 친구의 필명을 지을 때도 허투루 짓지 않는다. 내가 짓는 이름으로 한 사람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 p.44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생각했다. 아, 우리가 살아 있구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구나. 아이들과 시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아침이라니,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아침이 또 있을까. 손수 농사지은 것으로 요리를 하고, 릴레이 글쓰기를 하고, 산책하며 글감을 찾고, 밤새 마피아 게임을 하며 ‘인디언 밥’을 하고, 마당에 나가 하늘에 뜬 별을 바라보고, 함께 잠을 자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시를 읽으며 마음도 나누고 눈물도 나누었던 시간. 그 시간들은 수십 편의 글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심어주었다.
--- p.179
모든 아이가 글을 잘 쓸 필요는 없다. 쓰기 싫은데 억지로 붙들려 와서 시간을 죽일 필요도 없다. 그 시간에 잘할 수 있는,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그 아이의 인생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상처받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 p.188
나도 알고 있다. 글 쓰는 사람에게 첨삭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첨삭을 하지 않는다. 틀린 맞춤법이야 은근슬쩍 고쳐주지만 글의 구성이나 문장을 어떻게 바꾸라고 조언하지 않는다. 내 생각의 틀에 아이들의 생각을 가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아이들은 나보다 더 큰 세상을 가졌고, 나는 내 좁은 세상에 아이들을 가두고 싶지 않다.
--- p.197
그때는 몰랐다. 아이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지금의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그렇게 다른 이를 죽인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죽음과 내가 갖고 있는 죽음의 의미가 달랐다. 나에게는 죽음이 끝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아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아이들이 죽인 생명체를 되살리지 않았다. 떠날 것은 떠나고 다시 태어날 것은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두었다. 그것이 아이들이 정의하는 삶이고 희망이었다.
--- p.202
대안교육기관에는 다양한 아이들이 있다. 입시를 지향하는 공교육이 자신이 추구하는 바와 맞지 않아 이곳을 선택하거나,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조금은 천천히 세상을 배우기 위해 오기도 한다. 학교 폭력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이 세상과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오기도 하고,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을 겪고 오기도 한다. 나는 이 모든 아이들과 함께 나란히 서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 걷기에는 내 걸음이 너무 빨랐고, 이들을 기다리기에는 내가 너무 급했던 날들이 있었다. 이들을 품기에 내 세상이 너무 좁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마다 마음에 그늘이 생긴다.
--- pp.247~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