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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2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148쪽 | 168g | 125*200*20mm
ISBN13 9791192333625
ISBN10 1192333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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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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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앉아서 그대를 생각하네 그대 생각을 하는 내가 앉아 있고 그대는 없지만 그대 없는 이 자리에 그대가 있다는 생각의 자리가 있네 원두는 물방울을 타고 칙칙 날아오르고 그대 앉은 얼룩진 의자에는 쏟아진 그대의 안경들이 듬뿍 있네 우리 또 운명같이 만나면 이번에는 그냥 또 스쳐 갈 것인지 둘 중 누군가가 먼저 목소리를 낼지 여러 생각 말고 여러 의자 말고 그저 조용히 앉아서 생각을 하는 우리가 있네 어쩌면 처음부터 둘이었는데 둘을 알지 못하고 또 지나치기만 한 시간이 있었네 그 의자는 알고 앉아 있을 것이고 앉아 생각을 짓고 있을 것이라네 서로에게 쌓인 날들이 원두처럼 볶아지고 있을 때처럼 헤어짐이 결코 헤어짐이 아니라는 것을 원두의 껍질이 닳아지지 않는 것같이 아무런 이별도 아닌 또 만나고 의자처럼 본 세계를
---「그대의 앉은 자리에 내가 앉아 있고」중에서

음. 모름의 시. 그래. 그 시. 시 같은 것들은 잊고 살아야지, 라며 편지에 시를 넣어서 기차 창가 자리에 붙이고 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천국 김밥으로 가서 단무지를 썰고 배추김치를 입에 발랐다. 나무에 달린 달이 흘리는 눈물도 안 본 척을 하며 혈관이 톡, 톡??? 하며 흑색 감정의 입김을 내뿜으며 걸었다. 구두의 굽이 발바닥에서 왔다 갔다, 를 즐겨 할 때쯤 집에 도착했다. (중략) 순간 기절할 뻔했다. 내가 갖다 버린 시가, 시집이, 기차 창가 좌석에 있던 시들이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윗옷을 옷걸이에 걸자 시들은 옷걸이에도 걸려 있었다. 나는 옷을 다 벗고 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들은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시를 부름으로, 시가 오는 것을 알면서도, 부리지 않는 진짜 시인들이 있다. 시가 시를 부른다. 시가 시를 낳고, 소멸한다. 무이며 유의 시. 모두 당신의 시. 저 하늘에 누군가 삼층계의 유희로 만들어낸 산물만이 아닌, 앎으로 더욱더 다정해지는 세계. 그것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이자. 처음이고 끝인 세계. 나이고 너인 세계. 나의 아래에서 나오는 시의 광범한 우주의 세계. 시가, 나의 모두가 되는 특별한 시. 내가 천사가 아니었으므로 가능해서 가능한.
---「미학」중에서

몇 해 전부터 당신은 나의 세계를 경계 없이 들락날락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나는 없고 당신만 있다

맑은 하늘이 나무에 걸린 가을 나뭇잎의 날씨를 만들자는 당신의 작은 숨소리가 지금도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 날아가지 못했다 꽃피우지 못한 말들이다 또 부메랑처럼 내게 다가온다 밀려와 나를 생각의 굴레에 빠뜨린다

무얼 생각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없고 나 없는 당신의 세계를 말하고자 한다

당신의 세계는 어지러운 생각이다 더러운 생각이다 당신을 생각하면 머리가 깨진다 깨진 머리카락들이 징글징글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숨소리다 꽃이 숨을 내뱉는 공기다 꽃이 피워 올린 생각이다
제발 가, 다시 오지 말고 가,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생각이다

생각을 기차역에 두고 온 날이면
구두가 먼저 나를 벗는다
구두 굽에 달라붙은 당신, 내가 생각을 버리고 왔는데 생각은 버리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거야, 하고

어디선가 내 밤을 보고 있는 당신의 숨소리가 들린다
---「꽃, 숨」중에서

바다의 모래알을 주머니에 넣어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주머니 안의 모래는 빨강 신호등을 비추고 멈추었다
멈춘다는 것은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정하는 일

사실 모래의 기원은 어제로부터 시작된다 모래는 모레를 먹고 키가 커진다 모래를 삼키며 자란 모레를 통해 흘러나온 신호등 불빛을 따라 모래의 발자국이 나온다

발자국에 담긴 시선들이 눈부시다
주머니 속에 있던 모래알들이 차도에서 차선으로 쏟아져 나온다

모래는 아무도 모르게 모래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모래의 방식으로 먹고 뱉고 씹고 마시고 배설하고 사랑하고 죽는다

바다의 모래알을 주머니에 넣어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모래가 비추는 신호에 따라 살아온 적이 있다 모레를 기다리며 모레를 애쓰며 모레를 지우며 모레를 잡으며 우리의 모레가 모래가 될 때까지 그렇게
---「빨강 모래알」중에서

어제 잠든 자의 양고기가 담긴 점심은 오늘 산 자들의 아침 기도문입니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빗자루로 쓸어내는 날들로 장례식은 무덤에서 진열되고 있습니다 바위가 팡, 팡팡 구르고 산은 햇빛의 일곱 물줄기로 갈라지고 있네요 한쪽에서는 포도주가 담긴 병들을 무너뜨리고 또 한쪽에서는 포도나무에서 딴 열매를 벗기고 있고요 빗방울의 껍질은 바위틈에서 쪼개지네요 발가락에 달린 사진기가 셔터를 누르는 직업병은 무방비 도시에서도 노출이 됩니다 십자가가 하늘에 못을 내려놓습니다 건축자가 버린 모퉁이 돌멩이가 골고다 언덕을 가볍게 걸어서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컷, 빗방울은 곤두박질쳤습니다 다리는 여행에서 돌아오면 사진을 그림처럼 조용히 찍은 기법을 넘겨주는 밤의 연속이었습니다 밤마다 내 다리가 나를 두고 여행을 갑니다
---「몽환의 양식」중에서

누워 있는 고양이의 가지런한 움직임을 봅니다 자갈밭에 누워서 나누는 대화를 보면 대추나무가 가지를 흔듭니다 자동차들이 드나드는 발자국을 따라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고양이들은 뒹굴다가 어디로 떠나는 건지 어색하기만 한 흔적들만 남겨 놓습니다 매리골드의 정렬은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고양이는 직선으로, 매리골드는 둥근 움직임으로 서로의 행방을 쫓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저마다 햇빛들이 입술에 둔 바람을 뱉어냅니다 공중에 떠다니는 구름의 혼들이 지나갑니다 떠다닙니다 그렇게 떠다니다가 나뭇가지에 닿습니다 솔방울이 또 흔들립니다 나무가 흔드는 것인지 바람이 흔드는 것인지 햇빛이 흔드는 것인지, 중요하지 않은 질문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답은 언제나 고양이의 몫입니다 캄캄한 어둠이 몰려오는 크기로 고양이들이 오고 있습니다 성립된 식은 다 밝습니다 안전한 걸음 속에 당신의 눈동자가 보입니다 누군가 하얀 불빛들을 껐다 켰다 하는 밤입니다 밝아지는 밤이 다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내내 아침입니다 내내, 당신입니다
---「장미를 올려놓으세요」중에서

사랑에 빠졌다
이 펭귄은 귀가 길고 마음이 길고 눈썹이 길다

세상의 모든 것 중에
긴 것의 가장
기다란 사람이다

펭귄을 사랑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나는 펭귄을 사랑하고
펭귄의 걸음을 사랑하고
펭귄의 신발을 사랑한다

펭귄도 나를 사랑할까 안 할까

펭귄이 입은
패션의 끝은 신발이다

펭귄의 신발은 둥글고 신발 끈이 동그랗고
신발주머니도 둥글다

주인을 닮은 신발과 끈과
길고 긴 따듯한 주머니,

하나의 나뭇가지가
다른 하나의 나뭇가지에 도움닫기를 하는
계절이 뒤덮인다

펭귄도 나를 사랑할까

항상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나와 거리가 아주 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를 수도 있다

이것은 신발의 불가항력의 법칙이다
이것을 신발이 걷는 불가항력의 법칙이라 부른다
이젠 펭귄이 나를 사랑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이 펭귄과의 사랑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기로 한다
---「펭귄과의 사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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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과의 사랑』, 이 아름다운 시집을 어떤 문장으로 설명하지, 하고 서성이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포레의 〈파반느〉가 들려왔다. 밤하늘에는 앞으로 200년 동안 없을 개기월식이 시작되었다. 한 존재가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원고 뭉치 옆에는 어느 작은 책방 대표님이 그린 펭귄이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모두, 이 시집 때문에 일어난 일 같았다.

박래빗의 시 세계에선 캄캄한 어둠이 몰려오는 크기로 고양이들이 온다. 태양이 하늘에 부딪히고, 빗방울의 껍질이 바위틈에서 갈라지며, 모래는 모래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이 세계에선 고정된 상태로 정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아 버린 구성물들이 시공간을 오가며 무엇이든 되어 보고 불쑥 나와 자리를 바꾼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별이 되는 거예요.”(「바람 빼기 자세」) 이 세계에서 이런 결심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시집을 읽는 동안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살아가듯이 세계도 살아가고 있음을, 내 하루가 이렇게 구체적이듯 거대한 세계의 하루도 어마어마하게 구체적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시인에게는 잠이 드는 색도 보이고 넓고 높은 물의 숲도 보인다. 할머니가 가신 극락에서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실지 궁금해하고 동그란 쿠키의 맛과 납작한 쿠키의 맛을 시로 비교하는 시인이 너무 바빠 보여서 세계의 구성물들이 시인에게 자꾸 전화를 걸고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다. 이 시집을 읽을 때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선율이 흘러나오고, 우주쇼가 시작되며, 놀랄 만큼 우연한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길 바란다.
- 김은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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