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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툼

카르툼

: 대영제국 최후의 모험

리뷰 총점9.5 리뷰 4건 | 판매지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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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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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년 12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640쪽 | 152*224*35mm
ISBN13 9788933706725
ISBN10 8933706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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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마이클 애셔 Michael Asher
영국의 작가이자 탐험가이며, 영국왕립문학협회 회원이다. 리즈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세계 최고의 특수부대 중 하나로 꼽히는 SAS에서 근무했고, 3년간 수단에서 살며 아랍의 언어와 문화를 익혔다. 영국왕립지리학회의 네스 상, 영국 왕립스코틀랜드지리학회의 뭉고파크 메달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Impossible Journey: Two Against the Sahara(1988), Lawrence: The Uncrowned King of Arabia(1998), The Real ‘Bravo Two Zero: The Truth Behind Bravo Two Zero’(2002), Get Rommel: The British Plot to Kill Hitler’s Greatest General(2004) 등 역사서 14권, 특수부대를 소재로 한 Death or Glory(2009) 시리즈 등 소설 7권과 TV 다큐멘터리 6편이 있다.
역자 : 최필영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에서 공부했다. 2003년 9월부터 2004년 4월까지 한국군 건설공병지원단 통역 장교로 이라크와 쿠웨이트에서, 2006년 11월부터 2008년 5월까지 UN Mission in Sudan(UNMIS)의Military Observer와 Military Training Cell 교관으로 수단에서 근무했다.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수단 내전의 원인과 실상을 다룬 번역서『 수단 내전』(2011)을 출간했고, 남수단 분리와 독립의 최대 쟁점인 아비에이(Abyei) 문제를 다룬 「아비에이 문제의 원인과 전망」『( 아프리카연구』 제30호, 2011년) 등 아프리카 연구 논문 2편을 발표하였다. 현재 육군 소령으로 복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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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책의 역자 입니다.
2014-05-23
카르툼을 옮긴 최필영입니다.

이 책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타인의 일상이 어떻게 우리의 내일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주는 사례라는 생각에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에게 몹시 생소한 수단에 1년 반을 머물면서 느꼈던 것들을 독자적인 기록으로 남기지는 못하지만 무엇으론가 남길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일이기도 합니다. 아프리카로 떠나면서 참고할 것이 부족했던 현실을 반복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일정 부분 작용했습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역사서입니다. 현대 수단의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는 사건의 기원을 추적합니다. 하지만 저자인 애셔의 필력은 읽는 사람을 빨아들일만큼 강력합니다. 생생하고 세밀한 묘사는 마치 독자가 그곳에 있는 듯 착각하게 만듭니다. 잘 쓴 전쟁 소설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더욱이 화승총과 강선총 그리고 기관총이 공존하는 무기 발달사로 봐도, 영국과 프랑스가 아프리카를 놓고 벌인 19세기 외교전으로 봐도, 집단 대형에서 각개 전투원 중심의 전투기술 발전 단계를 모두 포괄하는 영국-수단 전쟁은 이런 다양한 분야를 모두 짚고 넘어가는 역사적 사건으로 중요성이 있습니다.

수단 현대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께는 저의 졸역 『수단 내전』도 함께 권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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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5일, 샤이칸 전투에서 승리한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은 수단에 마흐디국을 세웠다. 당시까지 아프리카대륙에서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한 곳은 마흐디의 수단뿐이었다. 샤이칸 숲의 패배는 서구에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때마침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50주년을 앞두고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영광이 정점에 다다르던 시절, 일개 반군에게 원정군이 몰살되었다는 소식은 빅토리아 시대의 앞길에 큰 숙제를 안겨주었다.
1820년, 무함마드 알리의 군대가 이집트 남쪽 경계를 건너기 전, 수단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저 황량한 구릉과 산, 계곡과 늪, 호수와 푸른 초원, 불모의 사막과 해안선으로 이뤄진 259만 제곱킬로미터의 거대한 땅덩어리일 뿐이었다. 그곳엔 얼마 되지 않는 초지에서 농사를 짓거나,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유목민들이 부족을 이뤄 이리저리 흩어져 살고 있었다. 부족들이 쓰는 언어만도 400개에 달했다. 어찌 보면 수단은 아랍과 아프리카 문화의 혼합체였다. 수단에 아랍인이 정착한 것은 12세기경부터였고 아랍인들은 이 땅을 ‘검은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을 지닌 ‘빌라드 아-수단bilad as-Sudan’이라 불렀다.
지난 400년간 수단에선 부족 간의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오스만제국의 술탄이 수단 땅에 영지를 건설하자 내란의 양상은 더 복잡해졌다. 18세기까지 수단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은 청나일강 유역의 센나Sennar를 수도로 삼은 푼즈Funj였다. 푼즈는 16세기, 원주민 농민과 아랍 유목민이 연합해 만든 술탄의 영지였으나 잦은 내란을 치른 덕에 1820년대에 들어서서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한 채 점점 더 쪼그라들고 있었다. 1821년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 침공군이 센나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알바니아 출신인 무함마드 알리 파샤는 오스만제국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이집트 총독까지 오른, 운 좋은 인물이었다. 무함마드 알리는 명목상으로는 오스만제국의 최고 지도자인 술탄의 부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이집트를 직접 통치하는 군주나 다름없었다.
술탄은 세속 군주이자 동시에 최고 종교 지도자이며 세상에 알라의 뜻을 처음으로 전한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계자이다. 따라서 무함마드 알리가 수단을 정복하자 수단은 원칙적으로 오스만제국의 영지이면서 동시에 오스만제국의 식민지인 이집트의 식민지가 된, 이상한 형국이 만들어졌다.---pp.검은 사람들의 땅, 45~46

영국군은 많은 인종의 ‘야만인’들과 싸워봤지만 야만인이 영국군보다 더 용감한 적은 없었다. 제60소총연대 소속의 퍼시 말링Percy Marling 중위는 당시 경험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이번 전투는 그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다. 누구보다 베자족이 가장 대담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말링 중위가 종교적인 열정이라고 표현한 것은 쉽게 말해 투혼이었다. 베자족은 결코 종교적인 광신도가 아니었다. 베자족의 시체를 살펴본 벌리 특파원은 그들이 자기와 아주 흡사한 모습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몹시 놀랐다. “베자족은 사나운 야만인이나 피에 굶주린 사람이라기보다는 열성적인 사람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중략) 베자족이 보여준 과감하다 못해 무모해 보이는 돌격은 영국군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심지어 불러처럼 남아프리카에서 줄루족과 싸운 경험이 있는 사람도 이런 형태의 돌격은 본 적이 없었다. 줄루족은 커다란 무리를 이뤄 공격했기 때문에 잘 훈련된 소총수들이 일제사격을 가하고 신속하게 재장전할 수 있으면 제압할 수 있는 표적에 불과했다. 그러나 가혹한 사막에서 성장해 깡마르고 팔다리가 긴 베자족은 느슨한 대형으로 무리를 지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려들며 공격했기 때문에 사격으로 제압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이러한 베자족의 용맹함은 훗날 영국 민담에서 되살아났다. 나중에 러디어드 키플링이 쓴 시 「퍼지-워지Fuzzy-Wuzzy」에 ‘1급 전사first-class fighting man’와 같은 구절로까지 등장한다. 에-테브 전투 이후, 베자족이 300미터 안으로 접근해 이들을 막을 확신이 들기 전에는 사격하지 말라는 지시가 영국군에 떨어졌다. 베자족은 보병이 아니라 ‘명예 기병’으로 취급될 정도였다. 베자족을 상대할 때는 마치 말 탄 사람을 상대하는 것처럼 넓게 열린 곳에서 확실한 방진을 구성해야 했다.
베자족이 영국군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처럼 베자족 또한 영국군으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예기치 못하게 패했다는 것이 베자족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들은 과거 6천 년 동안 싸워온 전통이 있었고 ‘야만인’에게 진다는 것은 익숙한 경험이 아니었다. 이들은 으레 그렇듯 이번에 온 ‘튀르크인’ 또한 쉽게 쫓아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불을 쓰는 악마들은 예전처럼 총을 내던지고 도망가거나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자기들을 압도하고 패배시켰다. 이 새로운 ‘튀르크인’은 잔인하기로 유명한 베자식 공격에 맞서 고도의 극기력을 보이며 방진을 유지했다.---pp.마지막 열차, 221~224

이렇게 만들어진 철도에는 수단군사철도Sudan Military Railway라는 이름이 붙었다. (중략) 1896년에 하루 0.8킬로미터씩 건설할 때부터 견습공으로 일했던 철도 기술자들은 하루에 3.2킬로미터를 설치하는 숙련공이 되어 있었다. 이 노선에 새로운 인부 1천500명이 합류하면서 수단군사철도를 건설하는 인력은 모두 3천 명까지 늘어났다. 3천 명이나 되는 인부에게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제공하고 만족스럽게 대우해 열심히 일하도록 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야말로 키치너의 천재성을 발휘하는 데 알맞은 일이기도 했다. 건설 인력 대부분은 철도 부설이 이뤄지는 맨 앞에서 나흘 혹은 닷새에 한 번씩 숙영지를 전진시키며 생활했다. 이 숙영지는 식당으로 쓰는 천막을 포함해 천막 수백 동과 전신, 우편 사무소, 상점, 급수장과 저수조로 구성되었다. (중략)
키치너가 ‘수단 기계’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바로 수단군사철도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업적 때문이다. 철도 건설은 마치 기계처럼 정확하게 진행되었다. 철도 건설의 선봉은 선로 부설 현장에서 약 10킬로미터 앞에 머물며 작업하는 측량반이었다. 측량반은 키치너가 신뢰하는 젊은 공병 장교 두 명이 지휘했고 그 밑에는 영국 공병 부사관 한 명 그리고 경위의經緯儀와 수준기水準器를 사용할 줄 아는 이집트군 측량병 18명이 있었다.
측량반은 마치 거대한 강철 뱀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철로 건설에서 두뇌 역할을 수행했다. 측량반은 번호가 적힌 나무 말뚝을 100미터마다 박아 나갔다. 얼마만큼 흙을 돋워 토대를 만들지 또는 얼마만큼 땅을 깎아내야 할지를 적은 지시문이 매일 철로 건설 끝자락에 있는 공사 감독에게 전달되었다. (중략) 측량반의 외각 방어를 담당한 아바브다족 낙타꾼들은 무라트에 있는 거점을 중심으로 일정하게 사막을 순찰했다. 아바브다족 낙타꾼들은 측량반보다 65킬로미터나 앞에 나와 있었기에 설령 기습할 생각으로 마흐디군이 접근하더라도 사전에 기습 의도를 파악하거나 마흐디군의 흔적을 발견해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 (중략) 구름 한 점 찾을 수 없이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사막 위로 철길이 조금씩 길어졌다. 철도대대는 용광로 같은 더위, 아무리 물을 마셔도 풀 수 없는 갈증, 격렬한 노동에 수반되는 허기, 사막의 질병, 그리고 가혹한 모래 폭풍과 끊임없이 싸웠다. 수단군사철도 건설 과정에 몇 명이 죽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대략적인 짐작은 가능하다. (중략)
2년 뒤, 윈스턴 처칠은 이러한 소문을 암시하는 내용을 저서에 남겼다. “누비아 사막에는 무명 흙 무덤이 많이 있다. 이것들은 철도 건설 현장을 따라 숙영지의 이동 흔적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 달성되는 것은 없다는 교훈을 보여준다.”---pp.옴두르만의 원한, 495~501

아브달라히는 마지막 남은 부대를 맨 앞에서 이끌다가 용감하게 전사했다. 패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아브달라히는 푸르와 안장에 앉은 채 뜻을 함께한 에미르들과 함께 전통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기다렸다. 수단 사람들은 이를 명예로운 죽음으로 생각했다. 개인으로는 영광스런 죽음이었지만 아브달라히와 함께한 모든 이들은 북동아프리카 역사에서 별로 유명세를 받지 못했다. 마흐디가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글은 몰랐지만 거칠 것 없었던 바까라 유목민 덕이었다. 1880년, 피부가 까진 당나귀를 타고 이름 한 줄, 물자루, 그리고 헐렁한 웃옷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이 알-마살라미야로 느릿느릿 들어간 아브달라히는 결국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명목상으로는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마흐디국의 통치자였지만, 아브달라히는 그 국가를 이끌어간 실질적인 정부였다. 사방이 평평한 고즈에 있는 오두막에서 태어난 아브달라히는 걸음마보다 말타기를 먼저 배웠고, 아프리카에 이슬람 국가를 건설했으며, 그렇게 세워진 나라를 14년 동안 통치했다. 아브달라히의 피는 창을 들고 코끼리와 기린을 사냥하러 다니던 고즈의 붉은 흙으로 돌아갔다. 그에게 고즈는 훨씬 덜 복잡한 세상이었다. 15년 전, 아브달라히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던 샤이칸 숲은 불과 이틀 거리에 있었다.
마흐디국은 움 디바이카라트에서 최후를 맞이했지만, 마흐디가 뿌린 사상적인 영향은 죽지 않았다. 마흐디국이 사라지고 영국-이집트 공동 통치가 진행된 57년 동안 마흐디주의는 지하로 숨어들어 끈질긴 생명을 이어갔다. 1956년 1월 1일에 수단이 독립하자 이슬람에 기반을 둔 정치 세력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1964년부터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은 하산 알-투라비가 이끄는 이슬람헌장전선Islamic Charter Front이 수단을 지배했다. 그는 이슬람헌장전선이 마흐디와 칼리파 아브달라히가 구상한 노선을 국가 운영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산 알-투라비와 그의 처남이며 마흐디의 손자로서 움마 당을 이끈 사디크 알-마흐디는 1989년 쿠데타로 당시 대통령인 자파르 니마이리Jaafar Nimairi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현 대통령 오마르 알-바시르Omar al-Bashir를 자리에 앉힌 쿠데타 배후 세력이다.
1994년에는 하산 알-투라비의 후원을 받아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이 수단에 터를 잡고 4년 동안 머물렀다. 이 기간에 하산 알-투라비는 오사마 빈 라덴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면서 사상과 이념에 깊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훗날 명성을 떨친 알-카에다를 건설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1998년, 수단을 떠나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는 오사마 빈 라덴은 처음 수단에 왔을 때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반미反美를 외치며 그리고 아랍 세계에 있는 여러 ‘배교자’ 무슬림 정권을 향해 외친 선언은 단어 하나하나마다 마흐디의 선언과 짝을 이룬다. 2001년 9월 11일, 오사마 빈 라덴이 지휘하는 알카에다가 미국 뉴욕의 쌍둥이 무역센터 빌딩과 미 국방성 건물을 향해 일으킨 테러 공격은 100여 년 전 마흐디가 등장하면서 주창한 정서와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어떤 의미로는 케라리 전투에서 키치너 원정군의 대포에 스러져간 마흐디군 1만 명의 원한을 갚은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pp.옴두르만의 원한, 616~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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