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더미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도 아버지는 절대 동요하는 법이 없었다. 상인들에게 물건값을 지불해야 하며, 적절한 액수의 돈 없이는 집이 굴러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그는 도러시에게 엘런의 임금을 포함한 가계비로 한 달에 18파운드씩 주면서 입맛은 또 ‘고급’인지라 식사의 질이 조금만 떨어져도 바로 알아챘다. 사정이 이러하니 항상 빚에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 p.45
나는 누구일까? 머릿속으로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본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과 말들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말이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러자 질문은 또 다시 다른 형태로 바뀌었다. ‘나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이번에도 역시 감정이나 기억은 답의 실마리를 주지 못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쩌면 우연히도, 손가락 끝이 몸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존재한다는 걸, 이 몸이 그녀의 것이며 바로 그녀 자신이라는 걸 아까보다 더 확실히 실감했다.
--- p.137
강한 햇빛 속에서 마흔 명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나무를 땐 연기와 홉 냄새를 맡으며 힘들게 일했던 그 기나긴 시간에는 묘하면서도 잊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오후가 지날수록 너무 피곤해져서 서 있기도 힘들었고, 작은 녹색 진디가 머리카락과 귓속으로 들어와 괴롭혔으며, 독한 즙에 물든 손은 피를 흘릴 때가 아니면 흑인의 손처럼 시꺼멨다. 그래도 행복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복이었다. 그 일은 사람을 휘어잡고 집어삼켰다. 미련하고 기계적이고 고단한 일인 데다 날이 갈수록 손이 더 아팠지만, 일이 싫어지지는 않았다. 날씨가 화창하고 홉이 잘 열려 있으면, 평생 홉을 따며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174
아버지의 침묵이 의미하는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아버지는 셈프릴 부인의 이야기를 믿은 것이다. 그녀, 도러시가 망신스러운 가출을 한 다음 거짓 변명을 늘어놨다고 믿은 것이다. 그래서 너무 화나고 괘씸해서 답장을 쓰지 않았다. 아버지가 바라는 건 그저 그녀를 지워버리고, 모든 연락을 끊어버리는 것뿐. 묻히고 잊혀야 할 망신거리에 불과한 그녀를 눈앞에서도 머릿속에서도 없애버려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아버지의 생각을 알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무모한 일을 꾀하고 있었는지 퍼뜩 실감이 났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당연하잖아!
--- p.205
헛된 구직 활동이 계속되는 사이, 돈은 하루에 1실링씩 줄어들었다. 항상 굶주린 상태로 겨우 연명만 할 정도의 금액이었다. 아버지가 도와주리라는 기대는 거의 접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배가 고플수록,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이 희박해질수록 처음의 공포는 차츰 사그라들어 절망적인 냉담함으로 변했다. 괴로웠지만 크게 두렵지는 않았다. 그녀가 빠져들고 있는 밑바닥 세계는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덜 끔찍해 보였다.
--- p.222
이 일을 겪으면서 도러시는 하루를 연명하는 데 필요한 1실링을 아주 쉽게 구걸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그녀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허기지거나 아침에 윌킨스 카페에 들어가기 위해 1페니가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절대 구걸하지 않았다. 못 할 것 같았다. 노비와 함께 홉 농장으로 가는 동안에는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구걸을 했었다. 하지만 그땐 달랐다. 도러시는 그때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이제는 정말 배가 고플 때만 용기를 짜내어, 친절해 보이는 여자에게 동전 몇 푼을 부탁했다.
--- pp.273~274
3주 전까지만 해도 비참하게 고생하던 그녀가 이토록 쉽게 일자리를 구하다니, 갑자기 다른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아 놀라웠다. 돈의 신비로운 위력이 새삼 뼈저리게 느껴졌다. 워버턴 씨가 즐겨 하던 말이 떠올랐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장에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전부 ‘돈’으로 바꾸면 열 배는 더 의미 있는 내용이 된다는 말이었다.
--- p.291
“이것만 알아둬요.” 부인은 이렇게 운을 뗐다. “학교에서 중요한 건 한 가지뿐이고, 그건 바로 수업료예요. 아이들의 정신을 성장시키느니 뭐니 하는 건 중요치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아이들의 정신을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수업료예요. 그게 상식이죠. 돈을 못 번다면 뭐 하러 그 고생을 하면서 학교를 운영하고 귀찮은 애새끼들이 집 안을 발칵 뒤집어놓도록 내버려 두겠어요. 수업료가 먼저고 나머지는 그다음이에요.
--- p.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