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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쉴 곳을 찾아서

조지 오웰 소설 전집이동
리뷰 총점9.0 리뷰 3건 | 판매지수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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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2월 16일
쪽수, 무게, 크기 384쪽 | 380g | 120*188*30mm
ISBN13 9788932322742
ISBN10 8932322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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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나 자신에 대한 환상은 전혀 없었다. 뚱뚱하고 붉은 얼굴에 틀니를 끼고 천박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걷는 내 모습을 저 멀리서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나 같은 인간이 신사처럼 보일 리 없다. 200미터 떨어져서 봐도 곧장 알아챌 것이다. 내가 보험회사 직원이라는 건 몰라도, 영업 사원이나 외판원 쪽이라는 건 간파하리라. 내 옷차림은 사실상 그런 종족의 제복이나 마찬가지였다. 낡아빠진 회색 헤링본 정장, 50실링짜리 파란 오버코트, 중산모,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 그리고 수수료를 받고 상품을 파는 사람 특유의 거칠고 뻔뻔한 표정.
--- p.22

나는 15킬로미터 넘게 걸었는데도 힘들지 않았다. 하루 종일 블랙 핸드 패거리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그 애들이 하는 건 전부 다 하려고 했고, 패거리 애들이 ‘코흘리개’라 부르며 최대한 나를 무시하려고 했는데도 그럭저럭 잘 버텼다. 내 안에서 근사한 감정, 느껴보지 않으면 모를 감정─하지만 남자라면 언젠가는 느낄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난 더 이상 내가 코흘리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드디어 소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소년이 되어 어른들에게 붙잡히지 않을 곳으로 돌아다니고, 쥐를 쫓아다니고, 새를 죽이고, 돌멩이를 던지고, 짐마차꾼을 건방지게 놀려먹고, 상스러운 말을 외치는 건 근사한 일이었다.
--- p.106

내 심정이 어땠을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잠시 후에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애가 타서 견딜 수 없었다. 허겁지겁 다른 연못으로 돌아가 낚시 도구를 챙겼다. 내 장비가 그 거대한 괴물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놈들 의 이빨에 머리카락처럼 싹둑 잘리고 말리라.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조그만 브림을 낚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큰 잉어를 보고 나니 구토라도 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자전거를 몰고 언덕을 내려가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소년에게는 근사한 비밀이 하나 생겼다. 숲속에 거무스름한 연못이 숨겨져 있고, 그곳을 괴물 같은 물고기들─한 번도 낚시꾼들에게 노려진 적이 없어 미끼가 보이면 당장에 물어버릴 물고기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놈들을 버틸 만큼 튼튼한 낚싯줄을 손에 넣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가게 계산대에서 돈을 훔쳐 튼튼한 장비를 구하리라.
--- pp.128~129

왜냐고? 그게 세상의 이치니까.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일반적인 인생이 아니라, 이 특정한 시대, 이 특정한 국가에서의 인생─이다. 항상 노동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농장 일꾼이나 유대인 재단사도 항상 일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끝없이 어리석은 짓을 부추기는 악마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치 있는 일에 시간을 내지 못한다.
--- pp.131~132

아버지는 근심 가득한 해명을 중얼거렸다. “요즘 장사가 신통찮아서” 형편이 “조금 어려워졌으니” 조와 내가 직접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진짜 장사가 신통찮은지 어떤지 알지도 못했고, 크게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왜 형편이 ‘어려워졌는지’ 이유를 알아챌 만한 장사꾼의 본능도 없었다. 사실 아버지는 경쟁에서 나가떨어진 것이었다.
--- pp.150~151

내리막길을 걷는 작은 가게 주인은 곁에서 지켜보기가 괴롭지만, 해고를 당하자마자 곧장 실업수당을 받는 노동자처럼 급작스럽고 명백한 운명을 겪지는 않는다. 이번엔 몇 실링 잃었다가 다음엔 6펜스 버는 식으로 작은 기복을 겪으며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려갈 뿐이 다. 수년간 거래해오던 사람이 갑자기 발을 끊고 새러진으로 가버린다. 다른 누군가는 암탉을 열 마리 남짓 사고 우리 가게에 매주 모이를 주문한다. 이런 식으로 가게는 계속 굴러간다. 본전을 뽑지 못하니 걱정이 조금 많아지고 더 구차해질 뿐, 그래도 아직은 ‘자기 가게의 주인’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몇 년은, 운이 좋으면 평생 버틸 수 있다.
--- p.166

난 더 이상 교양인이 아니었다. 현대사회의 현실에 찌들어 있었다. 그럼 현대사회의 현실이란 뭘까? 음, 한 가지만 꼽으라면, 물건을 팔려는 끝없고 광적인 몸부림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파는 형태를 띤다. 말하자면 일자리를 구하고 지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로는 직업을 불문하고 언제나 일자리보다 구직자가 더 많았다. 이는 우리의 삶에 기묘하고도 무시무시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침몰하는 배에 남은 사람이 열아홉 명인데 구명조끼는 열네 개밖에 없는 느낌이랄까.
--- p.206

반면 힐다에게 속물근성은 눈곱만큼도 없다. 상류층 신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나를 깔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내 생활 습관이 너무 귀족적이라고 생각한다. 찻집에서 식사라도 한 끼 하면, 내가 종업원에게 팁을 과하게 준다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무섭게 따지고 든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생각이나 외모까지 그녀가 나보다 훨씬 더 확실한 하위 중산층 사람이 된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물론 ‘절약’한다고 야단을 떨어서 큰 성과를 얻은 적은 없었다. 절대 그럴 수가 없다. 우리는 엘즈미어로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잘살거나 혹은 못살고 있다.
--- p.221

20년 동안 보지 못한 시골을 지나가는 건 묘한 경험이다. 낱낱이 기억나기는 하는데, 전부 잘못된 기억인 것이 다. 거리감이 다르고, 이정표로 삼았던 지형지물들은 딴 곳으로 옮겨 간 것처럼 보인다. 분명 이 언덕은 훨씬 더 가팔랐었는데? 저 갈림길은 반대편에 있었는데? 계속 이런 느낌이 든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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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의 소설은 현대적이다 못해 어떤 면에서는 현대의 작가들보다 더 현대의 폐부를 찌른다.
- 장강명 (소설가)
‘조지 오웰’이란 이름은 시대와 세계를 파악하는 탁월한 인식의 도구이자 언제나 유효한 지식 그 자체다.
- 정용준 (소설가)
오웰 식의 흥미로움은 무엇보다 그가 인간의 본질을 세밀하게 묘파해나가는 데 있다. 소설만큼이나 많이 썼던 르포르타주와 에세이에서도 드러나듯이 오웰의 사유는 빈 방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우선 세상으로 나아가고, 스쳐 가는 사람들의 행동과 양식을 관찰해 그들 삶의 조건을 밝혀낸다. 그러는 동안 인물이 자기 앞에 놓인 세계에 적응하느라 분투하는 장면이 태어나고, 그 ‘적응’이 타고난 기질과 맞물려 어떤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는지가 드러난다.
- 김성중 (소설가)
모든 작가들은 오해받는다. 하지만 어떤 작가들은 더욱 오해받는다. 조지 오웰은 오해받는 작가의 대표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오웰은 『동물농장』을 쓴 반공 작가나 『1984』를 쓴 예언자로 통한다. 그러나 그는 평생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으며, 광부들의 열악한 삶의 현장과 스페인 내전의 현실을 기록한 르포 작가였다.
- 금정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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