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필자가 2017~2022년에 신라 상대 관복제도를 주제로 게재한 글 4편을 모아 수정·보완한 것이다. 필자의 큰 학문(大學) 공부는 2002년에 시작했었고, 2009년 석사학위논문을 내면서 ‘사색공복(四色公服)의 의미’라는 짧은 절을 썼다. 석사학위논문의 절 제목에 쓴 7자(字)를 다소나마 책임지기까지 15년이 걸렸다. 이 책에서 다룬 문제는 필자의 뇌리에서 늘 맴돌던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의 삶에서 복식·장복 등 ‘옷’의 의미는 가볍지 않다. 옷은 잉태에서 장례까지 사람과 함께하나, 대부분의 사람은 삶의 처음과 마지막에 입는 옷을 자신이 선택하기 어렵다. 첫 옷은 아이를 잉태한 부모가 준비하며, 마지막 옷은 장례를 치르는 자식이 준비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에서 의미 있는 여러 옷이 있겠지만, 삶의 처음·마지막에 입는 옷은 전세(前世)·후세(後世)의 문화정체성을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근대화 이후 개인에게 의미 있는 시간에 함께한 옷은 대부분 양장이지만, 죽을 때 전통을 따른 수의(壽衣)가 여전히 활용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 점에서 옷의 변화는 단순한 패션의 유행·변화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개인과 옷은 세대를 걸쳐 형성되는 국가·사회·공동체의 문화 정체성을 매개로 과거·현재·미래의 3세가 이어져 있다. 따라서 장복을 포함한 옷의 변화와 그 함의에 대한 평가는 인문학적 가치의 변화와 평가를 내포하는 문제이다.
이 책에서 필자는 신라 상대 관복제도를 공복(公服)·조복(朝服)·무관복(武官服) 등 3개의 관복과 각 관복의 구성 품목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였다. 공복은 관인의 일상 근무복인 상복(常服)이자, 품목을 많이 생략한 종생복(從省服)·약복(略服), 즉 ‘줄인 옷’이다. 조복은 관인의 정복(正服)이자, 필요한 모든 품목을 갖추는 구복(具服), 즉 ‘갖춘옷’이다. 무관복(武官服)은 무관의 업무와 환경으로 인해 문관 관복과 차이가 있는 관복이다. 신라 관복의 구성 품목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핵심 자료는 신라 사신도 2장과 188~300여 자(字) 정도의 단편적인 문헌에 불과하다.
필자가 관복별 1벌의 구성 품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중국 정사의 예지·거복지·여복지와 ??삼례(三禮)??를 비롯한 각종 예서, 현존 복식 그림·유물과 전근대에 출판된 사전을 꼼꼼히 살펴야만 했다. 동이와 중국의 고대 관복은 어떤 부분이 같고 다르며, 같고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관인은 어떠한 때와 상황을 고려해 관복을 선택해 입어야 하는가? 국가는 어떤 상황에 어떤 관복을 입으라고 규정할 것인가? 이 책을 쓰면서 가장 많이 물은 질문이었다. 남은 고민거리와 읽을거리는 바다보다 많다.
이 책에서 선학에 대한 예를 미처 갖추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이것은 모두 필자의 탓이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지금보다 더 나아가기 위한 중간 점검을 위해 출판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의 출판이 훗날 고구려·백제·발해·고려·조선 등 전통 시대의 관복·복식 연구자들의 회합에 초석을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생 략)
---「책을 펴내며」중에서
신라 사신은 「번객입조도」에 33개국 중 31번째로, 「왕회도」에 24개국 중 17번째로 나타나며, 모두 공수(拱手) 자세로 그려졌다. 이에 문헌사·미술사·복식사에서 신라 사신의 복식이 연구되었다. 문헌사에서는 「양직공도」의 모사(摹寫)와 유전(流傳)과정, 제기(題記)의 전래와 변형과정이 논의되고, 「양직공도」 원본의 당대(唐代) 유존 여부와 「번객입조도」·「왕회도」에 수록된 사신도의 차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졌다. 2종 회화 자료는 백묘화·채색화란 차이가 있었고, 자료별로 수록된 사신도의 총수, 사신도의 배치순서, 각국 사신의 연령·면모·복식의 묘사도 다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수요자의 요구·제작 목적별로 여러 모사본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미술사에서는 중국 직공도(職貢圖)에 한인(韓人)의 도상(圖像)이 제작된 목적을 설명하고, 2종 회화 자료 속 신라 사신 복식과 『양서』·『구당서』 신라전의 풍속 관계 기사를 상호보완적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 p.20
양국은 특산·선호 옷감의 차이가 있었다. 마한은 부드럽고 무늬 없는 면(?·綿)이 특산 옷감이고, 금(錦)·수(繡) 등 무늬를 넣은 비단 및 계(?) 등 모직물을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다. 진한은 겸(?)이 특산 옷감이었다. 겸은 실을 세밀히 짜 오색으로 염색하고, 방수가 가능할 정도로 촘촘히 만든 옷감이다. 마한·진한에서 고급 옷감을 생산하고, 옷감의 선호도가 구별되었으므로, 양국 모두 상당한 옷감 제조기술을 보유했다고 판단된다.
--- p.41
신라 사신의 반응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된다. 첫째, 신라 사신은 자국 조복 관(冠)의 전통성을 인식하였다. 둘째, 신라 사신은 자국 조복의 관과 『예기』의 피변(皮弁)·변관(弁冠) 등 중국 고례(古禮)와의 관계를 인식하였다. 이는 382년 신라의 『예기』 이해도가 낮지 않았고, 상고기 말~중고기 초 신라의 군신(君臣)이 자국사 정보를 일정 정도 공유했으며, D의 시점이 『국사(國史)』 편찬 이후라는 점에서 이해된다. 즉 신라 사신은 대국 군자가 전통 있는 피변도 모르면서 신라의 관을 사이(四夷)의 관에 빗대었기 때문에 모욕으로 이해하였다. 헌사(憲司)는 신라·수 관계를 고려해 일단 이자웅을 탄핵·면직시켰고, 양제는 이자웅을 곧 복직시켜 강도 행차를 호종케 하였다.
--- p.65
신라 중고기 공복도 관인의 평소 공무나 관청 근무를 위한 관복이겠다. 따라서 착용자의 편의를 통한 업무 효율성 제고를 전제로 하겠으며, 마련된 품목도 많지 않았다. 신라는 520년 공복 제정에 앞서 509·517년 동시전(東市典)·병부(兵部)를 설치하였다. 상고기 다종·다양한 전(典)의 운영, 동시전·병부 설치의 함의, 509년 수도 행정을 맡는 육부소감전(六部少監典)과 4전(典, 식척전(食尺典), 직도전(直徒典), 고관가전(古官家典), 대사급(大舍級) 경성주작전(京城周作典))의 정비를 고려하면, 관인이 해당 관청에 출근해 공무를 집행하는 모습은 당연한 풍경이다. 503년 성현표위자로 격상된 신라국왕이 관인의 대우를 표현하는 예제를 재편하는 것은 이념적으로 당연하다.
--- p.84~85
수·당은 ‘배제(陪祭)·조향(朝饗)·배표(拜表)·대사(大事)’를 할 때, 신하가 조복을 입게 하였다. 신라-수·당의 외교에서 신라 사신은 신라왕의 문서를 수·당의 황제에게 전달하였고, 수·당 황제의 문서를 받아 신라왕에게 전달하였다. 수·당 사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양국간 외교는 표 등 문서의 수수를 위한 조회 참여가 전제되므로, 양국 사신은 자국 조복을 입어야만 하였다. 조복은 관품별 차등을 전제하나, 신라의 관위 체계와 수·당의 산계(散階) 체계를 완전히 등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국 관인이 상대국 관인의 위계 체계를 고려하지 않고, 타국 조복을 입는 것은 무례(無禮)한 일이기 때문이다. 신라-중국의 외교가 양국 간 빈례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사신의 자국 조복 착용은 신라-수·당의 외교에서만 국한되지 않는다. 신라-중국의 외교는 빈례를 전제하므로, 신라 사신이 조복을 입고 상대국에서 활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p.108
다섯째, 고(袴)·화(靴)·화대(靴帶)를 보자. 고·화는 고관 조복에 쓰였다는 자체로 독특한 품목이다. 중국사에서 고·화는 춘추전국시대 조(趙)의 무령왕(武寧王)이 기마병을 운용하고자 보급한 호복(胡服)이며, 수 양제 대업(大業) 원년(元年)~6년(605~610) 진행된 빈번한 대외원정으로 활동의 편의성을 고려해 문관에게도 통용시킨 품목이다. 다만 605~610년 고·화의 문·무통용은 임시 조치로, 수·당의 조복, 특히 문관 조복은 유(?)·군(裙)을 입도록 규정하였다. 조복은 ‘선왕법복(先王法服)·구복(具服)·정복(正服)’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반면 〈그림 4〉는 모두 고·화의 착용을 묘사했으므로, 신라 조복에서는 고·화의 착용을 규정하였다.
--- p.137
수·당 평건책(복)에 규정된 대구고(大口袴)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정착한 중국식의 통이 넓은 바지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무령왕이 호복(胡服)의 기마복(騎馬服) 중에서 고를 군복으로 수용하였다. 무령왕이 수용한 직후의 고는 통이 좁고 몸에 꼭 맞아 활동성이 높은 합당고(合?袴)였다. 합당고는 가랑이 선을 드러내었으므로, 반발이 많았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고는 평상복이 되며, 문관이 고습을 입고 천자를 알현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고는 품위가 없고 전통 예복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이 대안으로 중국식 의상 관념을 투영해 통·길이를 넉넉히 한 대구고가 출현하나, 기장이 길어 진흙탕·가시밭 등에서 걸을 때 걸리적거렸다. 이로 인해 대구고 무릎 아래에서 명주로 바지통을 묶어 나팔바지처럼 입는 박고(縛袴, 묶은 바지)가 유행하였다.
--- p.155
한전(韓傳)의 풍속 관계 기사에는 일반적인 마한·진한 남자의 복식과 구별되는 조복(朝服)의 존재가 보인다. 마한인은 한 군현을 포함한 대외 교류에 참여하고자, 의(衣)·책(?)·인(印)·수(綬) 등으로 대표할 수 있는 조복을 갖추었다. 조복의 구비 여부를 통해 마한인의 계층을 구분할 수 있다. 이것은 마한인이 조복의 의미·용도를 알고 있었으며, 조복이 마한의 위신재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마한의 사례로 미루어 진한에도 조복의 의미·용도에 대한 지식이 있었으며, ‘『삼국유사』, 선도성모수희불사 조’의 조의(朝衣)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타난 표현이다. 따라서 신라 상고기에도 조복이 활용되었다. 조복은 청정·조회를 위해 입는 관복이므로, 늦어도 남당 청정이 시작될 무렵에는 조복이 활용되었다.
--- p.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