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3년 02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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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308쪽 | 452g | 120*188*25mm |
ISBN13 | 9791170401636 |
ISBN10 | 1170401635 |
발행일 | 2023년 02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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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308쪽 | 452g | 120*188*25mm |
ISBN13 | 9791170401636 |
ISBN10 | 1170401635 |
1. 나는 피조물이었다 2.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3. 나 아닌 사람을 진정 사랑한 적이 있던가 4. 생명은 사랑이다 5. 내가 매일 기쁘게 6. 이어령 박사를 만나다 7. 지성에서 영성으로 |
무언가를 향한 마음을 쓰고 드러내는 일에 대하여
<당신, 크리스천 맞아?>를 읽고
"당신, 크리스천 맞아?" 필자의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무신론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로서 종교와 신앙의 역할을 인정하고 또 공감한다. 이번에 <당신, 크리스천 맞아?>를 집어든 것도 그 때문이다. 무엇보다 살아생전 뭇사람들로부터 책의 제목과 똑같은 질문을 받았고 스스로에게도 쉼 없이 되물었던 고(故) 이어령 선생이 쓴 책이기에, 서평단 모집 때 자연스럽게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책을 거듭 읽고도 막상 서평을 쓰려니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고민 끝에 이어령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답게 써보기로 마음 먹었다. 다시 말해 저자의 이야기를 굳이 종교적으로만 들을 게 아니라, 평소 그가 즐겨했던 '인문학적 시선'으로도 바라보자는 것이다.
저자는 국대(國代) 지성(知性)이자 70년 동안 무신론자로 살면서 성경, 기독교계와 교회의 부패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한 사람이었다. 그가 쓴 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에서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겠습니까"라는 마지막 구절도 "글 쓰는 사람으로서 아름다운 글로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싶었지, 믿음과 신앙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려(76쪽)" 쓴 것이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2007년 여름에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는 여러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사람들의 환호와 불신이 뒤섞인 그 물음 앞에 서게 된다. "당신, 크리스천 맞아?"
사실은 자다가도 몇백 번씩 얘기를 하거든요. '아니다'라고요.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난다'라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인간에게 훌륭히 전한, 그렇게 위대한 바울도 그랬는데 제가 세례 한번 받았다고 금세 착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죠.(17쪽)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지라 사도 바울이 어떤 인물인지 모른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탄압하는 일을 했다는 그도 결국엔 하나님을 믿게 된 것과 같이 자신도 다양한 만남의 방식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실명할 위기에 처한 딸 이민아 목사가 낫길 바라는 기도를 올리며 그가 세례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교토에서 홀로 생활하며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쓸 무럽부터 종교에 귀의할 준비를 했으며, 딸이 처한 상황이 '트리거'가 됐다고 말한다. 당시 그는 남은 생을 자기만의 방식, 즉 글로서 신앙심을 쏟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게 교토에서 찾고, 하와이에서 만나고, 한국에서 행했던 종교적 체험과 깨달음을 담아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썼던 것이다. 책에서 그는 말한다. 지성과 영성은 양립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궁극에 영성이 있다고. 아직 자신은 지성과 영성의 '문지방' 위에 서 있다고.
<당신, 크리스천 맞아?>는 '문지방 위의 대화', 곧 그가 수년에 걸쳐 여러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 강연 등에서 (어느 드라마의 명대사처럼) 크리스천임에도 당당히 그렇다고 '왜 말을 못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한 언론사의 '절대자에 대한 실존적 차원의 무릎 꿇기', 즉 무신론적 실존주의에서 유신론적 실존주의로 넘어간 것 아니냐는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떻게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성경을 읽느냐가 중요(111쪽)"하다는 저자의 말이 적어도 필자에게는 한 줄기 빛처럼 와닿았다. 성경을 역사적 사실로 읽는 사람들이나 교조주의자, 또는 원리주의자의 눈에는 이단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는 인문학적 관점에서 종교를 얘기할 수 있고 스스로도 신앙인으로서 찾고 또 답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성경을 '알레고리'라는 수사법으로 읽는다고 덧붙인다.
저는 그분들과 충돌하거나 서로 의견이 다른 게 아닙니다. 그분들은 '신학(神學)'을 하시고, 저는 거기서 니은(ㄴ)을 뺀 '시학(詩學)'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텍스트 읽기를 하고, 그분들은 실천하고 봉사하는, 분류하고 적용하고 요리해내는 역할이시지요.(243쪽)
여러 사례 가운데 한 가지만 살펴보자면, 저자가 오래 전부터 성경을 읽어오면서 가장 거부반응을 가졌던 것이 '노아의 방주'라고 한다. 물이 들어오면 뜨는 배를 왜 산꼭대기에서 만들라고 했으며, 그 배에 짐승 암수 두 마리씩을 넣었다는데 암수 없는 단성 생물들은 또 어떻게 되며,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이 한 공간에 사는 게 가능한 일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지성을 낳은 의문이 영성을 낳는 믿음'으로 거듭나자 '메타언어(대상을 직접 서술하는 언어 자체를 다시 언급하는 한 차원 높은 언어)'를 통해 제1창조는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시간'을 만들었고, 제2창조는 노아의 방주가 '공간'을 만듦으로써 혼란한 우주에 질서를 부여했다고 재해석한 것이다.
비록 문학 비평가 시점으로 성경을 읽었기에 종교적 해석과는 다른 점이 많을 수밖에 없겠으나, 절대자의 말씀을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로 다 옮기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을 낱말의 부분으로 읽기보다는 전체적 행위의 언어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텍스트 외에도 옛날 신혼방에서 얼어죽을 뻔 한 금붕어를 살려낸 일화와, 천적마저 떠난 영하 50도의 남극에서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는 황제펭귄에게서 생명의 소중함과 부활의 의미를 재발견해내기도 한다. 책의 말미에서 이러한 가치를 설파하고 실천하는 우리나라의 기독교인과 그들이 모인 교회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과 희망의 메시지를 함께 전하는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제는 그 문지방을 넘어 영성의 세계에 있을 저자에게 감사한다.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새로운 방법을 일깨워줘서, 나아가 신 혹은 종교를 넘어 무언가를 향한 마음을 쓰고 드러내는 태도에 대해 또 다른 영감을 선물해줘서.
저는 문지방에 서 있는 긴장으로 7년간 계속 왔습니다. 남들은 저를 욕할지 몰라도, 처음 세례를 받았던 그날을 잊지 않는······. 그리고 제가 크리스천과 논크리스천의 경계선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음을 숨기지 않고 모든 분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정직한 모습이며, 저와 같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이 언제가 문지방을 넘어가는 힘이 되어주는 게 제 역할이 아닌가 합니다.(234~234쪽)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이를 보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느냐고?
나도 한때 교회를 다닌 적이 있다. 수많은 의문을 뒤로하고 믿음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고 자칭 교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에 실망감이 커 교회 다니기를 그만두었다. 하여튼 평소 진정한 신자인지 아닌지는 본인과 하나님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요즘 막 쏟아지는 저자의 책이 반가우면서 고마운 가운데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일요일, 크게 이른 아침은 아니었지만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 집중하며 몰입이 잘 되는 게 신기했다. 진정성이 가득한 저자의 믿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귀 기울여졌다. 저자에 대한 하나님의 쓰임이 왜 그렇게 늦어졌는지 그 이유가 타당했고, 처음의 저자처럼 믿음을 지식으로만 해결하려는 지금의 내 모습도 함께 섞여 있기에 이는 나의 이야기라는 동질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타인의 시각에선 절대적으로 독실한 신자라고 보이더라도 세속적인 고난으로 인해 무너지는 경우를 가끔 접하며 고난에 굴하지 않는 진정성 있는 믿음을 갖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당신, 크리스천 맞아?"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저자의 신앙 고백을 읽으며 기독교와 믿음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저자는 세례 한 번 받았다고 금세 착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한다. 나 또한 교회를 다닐 때 세례를 받았지만 현재엔 무교다. 저자의 믿음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딸의 간곡한 기도가 있었지만 저자는 6살 때 이미 영성의 길에 들어섰음을 고백한다. 어렴풋이 이해될 것 같으면서도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그 이야기는 어쩌면 누구나 다 경험한 적이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 그러니까 인간이 부활을 하고 생명을 다시 찾는다는 것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영원성을 믿어야 하는 것이지요. p 35
- 지성은 울지 않습니다. 분석하고 심판하고 의를 따지지 않기 때문에 지성은 차갑고 명징하고 투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의 눈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지요. 눈이 흐려지면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슬프고 고통스러워도 지성의 눈은 아주 맑고 명료한 호수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제가 흘린 눈물은 지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감성, 감정, 그리고 사랑이죠. 이것은 지성의 무력함이요, 지성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의로운 하나님 이전의 것입니다. 즉, 사랑의 하나님인 것이지요. p57~8
- 우리는 끝없이 변절하고 끝없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기에 인간을 진실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고통이고 번민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것. 우리는 오직 한 분인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것입니다. p 78
- "한동안 신앙심이 흔들렸지요. 지금도 대단한 신앙심은 아니지만,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 배운 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요. 하박국에 나오는. 신이 정말 존재하는가. 있다면 참 잔인하다, 혹은 무분별하다. 왜 악인은 멀쩡하고 선한 자는 비참한가. 이런 회의를 안 겪은 사람이 없지요. 그것을 극복하는 게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예요. 나 또한 그런 체험을 겪으면서 신앙인이 되는가보다 싶었습니다. p 95
- ...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히 못 믿어요." p 122
예수의 부활과 죽음 뒤 이어지는 영원한 삶을 자신 있게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성이 아닌 영성으로 성경을 읽는 법과 믿음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이정표 같은 도서이다.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이 실제 한다면 믿지 않을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귀신은 있다 인정하면서도) 예수의 존재는 결코 인정하기가 쉽지 않은 나-이다. 믿음은 들으면서 난다고 하니 교회를 다녀볼까 하는 마음도 있는 요즘, 귀하게 다가오는 책이었다.
"제가 세례를 받을 때 목사님이 머리에 물을 막 부어 주더군요. 그때 말할수없는 눈물이 눈에서 막 쏟아졌습니다. 왜 울었는지 당시 나 자신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p56)" 실제로 기독교인 중에 이런 체험을 하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어령 박사 본인이 "내 인생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역성 드셨다는 걸 (처음) 느꼈습니다"라고 같은 페이지에서 얘기합니다. 세례라든가 안수 같은 걸 받을 때 이런 벅찬 감정을 접하고 눈물을 쏟는 이들이 이 비슷한 말을 공통적으로 하던데 고 이어령 박사 같은 지성인도 예외가 아니었나 봅니다.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어령 박사 같은 분이 21세기 들어 기독교인으로서의 영성을 고백하는 책과 글을 여럿 써 낼 때 많은 이들이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어령 박사는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 때 이미 자본주의는 붕괴(p106)되었고, 그렇다고 사회주의가 그 대안으로 내세워질 수도 없으니(같은 페이지에서 이런 취지로 말합니다), 생명 자본주의(이에 대해서는 p140 이하 참조. 이 박사님의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반대파의 주장을 충분히 예상하고 재반론을 편다는 데에도 있습니다)가 이 세상을 떠받드는 새 원리로 작동해야 하며 세 가지 필리아로 받들어지는 기독교가 이와 잘 매칭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자신을 "지성을 가진 실존적 리얼리스트"라 규정합니다(그렇기에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다는 뜻).
독자인 저 개인적으로 이런 회심(?)의 계기는 아무래도 따님(이민아 목사, 변호사. p65 등 참조) 관련 비극적인, 혹은 (반대로) 기적에 가까운 놀라운 여러 일이 아니었을까 짐작했었는데 이 책에 실린 (월간) 신동아 2011. 2 인터뷰에서도 이어령 박사는 조성식 기자의 질문에 대해 별 주저없이 수긍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게 모멘트가 됐다는 거지. 내 내부에서 붕괴를 촉진한 거지, 갑자기 딸 때문에 확 돌아버린 건 아니오."라고 적절한 선은 긋습니다.
박사는 밀턴의 <실낙원>도 인용합니다. "하나님, 언제 인간 만들어달라고 한 적 있습니까? 왜 당신이 멋대로 만들어 놓고선 회개하라고..." 운운이 악마의 말이며(여기까지는 원전상의 팩트), 재미있는 건 이 목소리가 현대로 치자면 AI의 목소리이기도 하다고 주장하는 대목입니다. AI의 부상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는 건 어느 분야 지성인, 전문직이나 비슷한 듯합니다(생전에 스티븐 호킹도 그랬고).
그런데 지금 챗 GPT(이어령 박사는 못 보고 타계하신)가 어지간히 주목을 끌고 있지만 그 정도까지 똑똑해지려면 아직 갈 길이 너무도 많이 남았지 싶네요. 악마의 영역을 넘보기에는 한참 부족합니다. 참고로, 이 박사님은 생전에 언제나 첨단기술에 호의적이었습니다. 1980년대부터 이미 워드프로세서로 원고를 쓰셨고 이 책에서도 VR, AR 등을 정확히 이해하여 논급합니다. p295에서 인공지능 시대에 교회가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주장도 잊지 않습니다.
p231에서 박사는 프랙털 이론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를 성경 서사 구조에도 접목시켜 왜 끊임없이 아브라함, 모세, 예수에 이르기까지 대속과 구원, 희생, 부활이 반복되어 (스케일만을 달리하여) 표현되는지를 설명하려 듭니다. 사탄은 우리가 천사로 보는 중인 이들 중에도 있고, 그 대부분은 위선자들입니다. 그 예로 빌라도 앞에서 예수에의 사형 집행을 외쳤던 유대인들, 심지어 경솔히 원죄로부터의 해방을 논한다면 박사님 자기 자신까지도 이에 해당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깊이 곱씹어 봐야 할 대목이 정말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