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周)나라 말기에 파(巴)나라에서 내란이 발생했다. 파나라의 장군 만자(蔓子)가 초(楚)나라에 군사를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3개 성을 주기로 허락했다. 초왕(楚王)이 파나라를 구원했고, 파나라가 안정되자 초나라는 사자를 보내 약속한 성을 요구했다. 만자가 말하기를, “초나라의 영명함에 의지하여 화란을 제거할 수 있었다. 우리가 진실로 초왕에게 성을 주기로 허락했으니 장차 내 머리로 사례할 것이지만, 성은 가져갈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마침내 만자가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했고, 파나라에서 그의 머리를 초나라 사자에게 주었다. 초왕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파나라의 만자 같은 신하를 얻을 수만 있다면, 무엇 하러 성을 요구하겠는가?”라고 했다.
--- p.21
한고제(劉邦))가 진(秦)나라를 이기고 자영(子?)을 붙잡았다. 항우(項羽)가 유방을 한왕(漢王)에 봉하여 파, 촉(巴蜀) 31개 현을 다스리게 했다. 유방이 기뻐하지 않았다. 승상 소하(蕭何)가 계책을 말하기를, “비록 한중(漢中)을 다스리는 것이 싫으시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또한 사람들이 ‘은하수[天漢]’라 부르니 그 호칭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무릇 한 사람의 아래에 몸을 굽혀 만승(萬乘)의 위에서 뜻을 펼칠 수 있었던 자는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한중을 다스려 그 백성들을 안무(安撫)하여 어진 이들이 이르게 하시고, 파, 촉을 거두어 쓰시고, 삼진(三秦)을 안정시키면 천하를 도모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 p.76
익주(益州)는 촉군(蜀郡), 광한(廣漢), 건위(??)를 ‘삼촉(三蜀)’이라 했다. 땅이 비옥하고 인사(人士)가 준일(俊逸)하여 익주 전체에서 명망이 높았다. 한나라 때 촉군과 광한 태수를 뽑을 때마다 덕행이 고상하고 지혜가 출중한 사람을 중시했다. 그러므로 앞에는 조호(趙護)와 제오백어(第五伯魚)가 있고 뒤로는 채무(蔡茂)와 진총(陳寵)이 있어 조정으로부터 표창(表彰)과 상을 하사받아 다른 군들과는 달랐다.
--- p.141
건안 19년(214)에 관우(關羽)가 형주(荊州)의 일을 통괄했다. 제갈량(諸葛亮)과 장비(張飛), 조운(趙雲) 등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 파동(巴東)을 항복시키고 파군(巴郡)으로 들어섰다. 파군 태수 파서(巴西) 사람 조착(趙?)이 막으며 지키고 있었는데, 장비가 공격하여 그를 물리치고 장군 엄안(嚴顔)을 사로잡았다. 장비가 그에게 일러 말하기를, “대군이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고 감히 맞서 싸운 것이냐?”라고 하자, 엄안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경(卿) 등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 주(州)를 침략하여 빼앗았다. 우리 주에는 단지 목이 잘리는 장군은 있어도, 항복하는 장군은 없다.”라고 했다
--- p.260
건안(建安) 13년(208)에 유표(劉表)가 죽고 막내아들 유종(劉琮)이 그의 지위를 계승했다. 조조(曹操)가 남쪽 정벌을 나서자, 유종은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선주(先主)는 번성(樊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조의 군사가 이르는 것을 알지 못했다. 완성(宛城)에 이르러서야 선주가 그 사실을알고,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철수했다. 당양(當陽)에 이르자 무리가 10만여 명, 수레가 1천 량(兩)에 달하여 하루에 10여 리밖에 행군하지 못했다. 따로 관우(關羽)를 보내 배를 타고 강릉(江陵)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떤 사람이 선주에게 일러 말하기를, “빠르게 행군해야 합니다. 비록 많은 무리를 데리고 있지만, 갑옷을 입은 자는 적습니다. 조조의 군대가 이르게 되면 어떻게 그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선주가 말하기를, “무릇 큰일을 이루는 것은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다. 지금 사람들이 나에게 귀의하여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차마 그들을 버리겠는가?”라고 했다.
--- p.286
건흥(建興) 2년(224)에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승상부를 설치하고 익주 목(益州牧)을 겸하니, 크고 작은 일에 관계없이 모두 제갈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마침내 제갈량이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법도를 분명하게 보이며, 관직을 줄이고, 권제(權制)에 순응했다. 충성을 다하고 시세에 도움이 되는 자는 비록 원수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범하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척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복종하여 진심을 드러내는 자는 비록 무거운 죄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석방했고, 유세하면서 말을 교묘하게 꾸미는 자는 비록 친척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죽였다. 선행이 미미하다고 하여 상을 주지 않음이 없고, 악행이 작다고 하여 폄적하지 않음이 없었다. 각종 사무에 정통했고, 사물은 근본을 궁구했다. 명칭에 따라 그 실질을 살펴 허위적인 사람은 뽑아 쓰지 않았다. 마침내 촉나라 안에서 사람들이 그를 경외하고 소중하게 받들었다. 비록 형법과 정령(政令)이 준엄하여도 원망하는 자가 없는 것은 그 마음 씀이 공정하고 상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 p.323
유민들은 이상을 믿고 마음대로 협박하고 도둑질하니, 촉 땅 백성들이 그것을 근심했다. 경등이 여러 차례 은밀하게 표문을 올려 이르기를, “유민들은 억세고 어리석으며, 촉 땅 사람들은 겁이 많고 나약하여 나그네와 주인이 서로를 용납할 수 없으니, 마땅히 본래 땅으로 옮겨 돌려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쪽 세 군(郡)의 험한 땅을 주어 살게 해야 합니다. 저들의상황을 살펴보니, 점점 더 커지도록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진주(秦州)와 옹주(雍州)의 화란이 양주(梁州)와 익주(益州)로 옮겨질 것입니다.
--- p.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