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닫기
사이즈 비교
소득공제
사마천 평전

사마천 평전

[ 양장 ]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 판매지수 108
베스트
동양사/동양문화 top100 1주
정가
40,000
판매가
40,000
배송안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11(여의도동, 일신빌딩)
지역변경
  • 배송비 : 무료 ?
eBook이 출간되면 알려드립니다. eBook 출간 알림 신청
  •  해외배송 가능
  •  최저가 보상
  •  문화비소득공제 신청가능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3월 15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775쪽 | 996g | 148*210*38mm
ISBN13 9791160871067
ISBN10 116087106X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사마담이 경사로 출사하였을 때 사마천은 고향에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가학의 계몽적인 교육을 받기에 가장 좋은 조건이었다. 사마천이 경사에 이르러 무릉 같은 곳에 머물면서 송독하는 것은 가장 열악한 조건이었다. 무릉읍은 이제 막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경사인 장안과 80리 떨어졌으니 어떻게 독서를 할 조건이었겠는가? 사마천은 고향에서 가학을 이어받아 4~5세 때 글을 읽고 글자를 알 수 있었으며, 10세에는 고문 서적에 통달할 수 있었다. 사마천은 고향에서 마을의 스승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학의 스승과 풍부한 장서가 있었으며 풍광이 수려하여 배경이 사람에 아주 적합하였다. 19세 이전에 사마천은 고향에서 농사짓고 공부를 하면서 해박한 학식의 기초를 다졌다. 원삭 2년 사마천은 19세였으며, 한무제는 부호의 집을 무릉으로 옮겼다. 이 시점이 되어서야 사마천은 비로소 경사로 가는 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때 백성을 옮겨 경사인 무릉을 채우는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사마천은 고향을 떠나려 하였다. 사마천이 고문을 익혀 역사를 편수하는 기본적인 공을 다지는 것이 고향에서는 이미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경사에 이른 이듬해인 원삭 3년에 행장을 꾸려 여행을 떠나게 된다.
--- p.66

사마천의 일생에 걸친 여행은 세 가지 상황이 있다. (1) 20세의 장유(壯游). 대강(大江) 남북과 회·하(淮·河) 양안 및 중원의 산하를 두루 답파하였으며 3년이 소요되었다. (2) 사명(使命)을 받든 파촉(巴蜀) 이남의 유력으로 지금의 서남쪽 대지에 해당하는 사천(四川)과 운남(雲南), 귀주(貴州)까지 발자취가 두루 미쳤으며, 1년 3개월이 소요되었다. (3) 무제를 호종한 유력으로, 낭중(?中)으로 출사했을 때부터 중서령(中書令)까지 무제의 순행을 호종한 30여 년이다. 이런 성격이 서로 다른 출유는 모두 사마천의 행년을 낭만적인 색채로 충만하게 하였다. 따라서 깊고 넓은 사회생활에 대하여 전방위적 고찰을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졌다.
--- p.79

독서는 이성적인 지식밖에 얻을 수 없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만 리 길을 가서 사회생활의 바다로 가서 드넓은 풍속을 이해하고 문자가 없는 책을 읽으면 진정된 감수성과 실천 지식을 얻게 된다. 대체로 큰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뛰쳐나가 백성 및 대중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 2천 년 전의 사마천은 문자가 없는 책이 학문을 하는 주지(主旨)임을 알았고 몸소 힘껏 행하여 사회로 달려들었다. 일을 행하는 것을 살펴보았고 장로들에게 물었으며 옛터의 사람들에게도 물었다. 남은 부로들에게도 물었으며 옛 성철(聖哲)의 유적을 찾아가서 그 사람됨을 생각해 보며 서성이다 고개를 숙이고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사마천이 그렇게 감정이 북받쳤으므로 『사기』에서 이를 강렬히 반영할 수 있었다.
--- p.85

사마천은 무제의 순행을 호종하였다. 그러던 중에 이번 서남이를 원정하여 공략하라는 사명이 그에게 하달되었다. 사마천에 앞서 사마상여와 공손홍이 서남이의 사명을 받들었는데, 모두 지혜롭고 유능한 사(士)였다. 이번 임무는 막중하여 한무제는 순유하는 도중에 사자를 파견하여 시종 사마천을 선택함으로써 제대로 사람을 얻은 것이었다. “봄”은 곧 원정 6년 정월로 출발지는 급현 신중향이었다. 한무제는 신중향에서 승전보를 전해 받았으며 남월 승상 여가(呂嘉)의 수급을 바치자 이에 신중향을 획가현(獲嘉縣)으로 바꾸었는데, 지금의 하남 신향현(新鄕縣) 서쪽이다. 사마천은 이때 낙양으로 가는 길을 잡아 장안으로 돌아왔다. 한중을 거쳐 파군(巴郡)에 이르렀으며 건위(?爲)로 남하하여 치의후 유에게 남이를 정벌하라는 명을 전달하였다. 이와 동시에 부사(副使)가 촉군에 이르러 서이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전달하였다. 사마천은 남이를 위무하여 안정시킨 후 서이로 들어갔고, 곤명(昆明)과 공(?), 착(?)에서 성도에 이르러 “돌아와 복명하였다.” 이미 이듬해(元封 元年) 봄이 끝날 무렵이었다. 「태사공자서」에 명확하게 하락(河洛)에서 부친을 뵌 것을 기록한 것은 원봉 원년이었다.
--- p.96

사마천이 섶을 지고 황하를 막은 것은 37세라는 한창 장년의 나이였으며 서한 또한 한창 강성했을 때였다. 한창의 나이에 한창 강성한 세상을 만나 엄청난 공을 세웠으니 그 즐거움이 어떠하였겠는가! 섶을 지고 황하를 막은 것은 사마천의 하늘을 찌르는 웅지(雄志)를 더욱 촉발시켰다. 이듬해 곧 원봉 3년이 되면 그는 부친의 뜻을 이어서 태사령이 될 것이다. 선방궁의 큰 비석은 “태사공서(太史公書)”라는 큰 비석의 성공을 환하게 보여줄 터이다. 사마천은 여기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는데, 선방의 공업을 대우가 물을 다스린 것에 비견하여 함께 논하였다. 「태사공자서」에서는 “우임금이 하천을 치자 구주가 평안해졌다. 선방에 미쳐서는 하천을 틔우고 내를 뚫었다. 「하거서」 제7을 지었다.”고 하였다. 섶을 지고 황하를 막은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사마천은 직접 그 일을 만나 씩씩하고 아름다운 청년 시절에 완전하고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었다.
--- p.111

사마 씨의 조상은 정백휴보(程伯休甫)에서 사마조까지 무공이 혁혁하여 자손들의 장한 뜻을 격발시켰다. 사마조는 진나라의 명장으로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으며 정치지도와 군사(軍事)에서 식견이 한 수 위였다. 사마근은 패군지장이 되지 않았으며 법을 따른 백기(白起)가 죽자 횡포에 맞서는 품덕을 지녔다. 사마천 조상의 드러난 군공과 사상 품덕은 한 대 또 한 대 자자손손 대대로 전하여지고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 귀중한 가학의 유산을 형성하였다. 사마담은 임종시에 사마천의 손을 잡아당기고 눈물을 흘리며 가르치기를 효자의 명의(名義)로 주공(周公)을 본받아 조상의 덕을 발양하고 선친을 빛내게끔 맹세하도록 하였다. 사마 씨가 대대로 주사(周史)와 군대를 다스리고 진을 치는 병학(兵學)을 맡은 것은 이렇게 『사기』에서 확대되고 발전되었다.
--- p.119

사마천은 동중서를 사사하여 그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공양가 학설의 정화를 흡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비판적인 정신으로 이를 개선시켰는데, 동중서의 언어를 차용하여 의의가 더욱 정미해지고 진보하여 실질적으로 발전시키고 개선시켰다. 「자서」에서는 동중서의 말을 끌어서 호수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사마천은 말했다. “내가 동생에게 듣자니 ‘주나라의 도가 쇠미하여 없어지고 공자가 노나라의 사구가 되자 제후들은 그를 꺼려하였고 대부들은 그와 담을 쌓았다. 공자는 말이 소용없고 도가 행하여지지 않을 것을 아셨다. 이에 242년간의 시비를 가려 천하의 의표로 삼으시고, 천자를 폄하하고 제후들을 물리치셨으며 대부들을 성토하여 왕도를 이루려 하셨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 p.132

「공자세가」에서는 공자가 정치에서 실의하여 낙망한 것을 써냈는데,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것은 흡사 공자의 정치에서의 비극이 나중의 육경의 정리에 종사하게 되는 복선이 되는 것 같다. 사마천 필치 아래서 공자의 봉헌 정신은 흡사 사회를 다스리는 모종의 목적을 위해 헌신하는 공리정신이라고도 하겠다. 바로 이런 정신은 공자가 정치 이상이 산산조각 난 이후에도 여전히 적막하게 알려지지 않은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분을 발하여 교육문화 사업에 전력하게 하였다. 이런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참된 정신은 사마천과 공자가 인격과 개성에서 일치하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사마천은 격앙되어 공자는 “벼슬을 하지 않고 물러나 시서예악을 정리하였는데,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고 썼다. 공자의 말대로 하면 “군자는 죽어도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병폐로 여긴다. 나의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후세에 스스로 드러나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공자의 분발과 노력은 성공하여 인륜의 만세 사표가 되었으며 사마천이 배우고 추종하는 모범이 되었다. 사마천은 경앙하고 숭배하고 심지어 정을 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p.147

사마천은 한무제를 수행하여 천지의 여러 신명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 활동의 모든 내용을 깊이 이해하였다. 「봉선서」에서는 상당한 편폭으로 진시황과 한무제가 미신과 귀신을 믿는 것을 풍자하였다. 지나치게 황당한 행위를 기록하고 들추어낸 것이다. 사마천은 제생(諸生)의 입을 빌려 진시황의 봉선을 “이 어찌 이른바 덕이 없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비평하였다. 진시황은 민정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고 오로지 봉선만 일삼아 국가의 멸망만 재촉했을 뿐이다. “지금의 천자는 즉위하자마자 귀신을 더욱 공경하였다.” 한무제에 대한 풍자는 더욱 날카롭다. 봉선의 전례가 정치적으로 응집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국가의 대사라 한다면 한무제가 무작정 바다를 순행하면서 신선을 구하고 수궁(壽宮)을 세워 신을 청한 것은 완전히 개인의 장생불사를 위하여 일으킨 우매하고 기상천외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사마천은 여기에 대하여 유감없는 풍자를 가하였는데, 이는 그의 진보적 역사관 가운데 하나이다.
--- p.192

이사장군 이광리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한무제의 총희 이부인(李夫人)의 오빠라는 이유로 한무제는 그에게 대군을 주었다. 이사는 본래 대원(大宛)의 도성이었다. 태초 연간에 이광리의 군사가 대원을 정벌하여 이사장군에 임명되었고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졌다. 이광리는 황제의 친척이라는 전폭적인 총애를 등에 업었지만 완전히 범용한 장수였다. 천한 2년 흉노에 출정할 때 한무제는 그에게 공을 세워 봉작을 더하게 하였지만 이 범용한 장수가 거느린 3만의 기병은 흉노의 주력군을 만나기도 전에 대패하여 많은 군사를 잃고 돌아왔다. 한무제는 방금 신하들이 바치는 승전의 축하주를 마셨는데, 갑자기 두 갈래의 군사가 패했다는 말을 듣자 제왕의 지엄함은 얼굴에서 싹 사라졌으며, 이 때문에 식사 때는 단것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하였고 조회에서도 기쁘지가 않았다. 비위를 맞추며 영합하는 무리들은 무제의 심사를 꿰뚫어 보고 이사의 패배를 말하는 것을 꺼리고 모든 잘못을 이릉에게 돌렸다.
--- p.243

이릉이 적에게 항복한 것은 뜻밖의 일로 사마천이나 한무제 모두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릉의 사건 전에 사마천은 “일심으로 자신의 직무에 힘써 임금님 환심을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늘 무제를 따라 호종하였고 임금과 신하 사이가 물고기와 물이 서로를 얻은 것 같았다. 정치적인 면에서 사마천의 인식과 한무제의 행사에는 갈래가 있기는 하였다. 다만 그는 사실(史實)을 실록(實錄)하는 역사학자로 한무제의 “다욕(多欲)”과 “한도가 없는(無限度)” 외정(外征)과 국내의 일을 비평하긴 하였지만 본의는 충심에서 나왔고 목적은 경종(警鐘)을 울리는 데 있었으며 정견을 펼치며 한무제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두 사람은 근본적인 이해의 충돌이 없었다. 다시 말해 한무제는 강의하고 교만한 웅주(雄主)이니 어찌 그 “원대한 도모”를 막을 수가 있겠는가! 한무제는 대신(大臣) 죽이기를 초개와 같이 여겼으니 하찮은 태사령이 어찌 그의 “원대한 도모”를 막을 수 있겠는가! 사마천 스스로 한무제가 기회를 틈타 자기를 징치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런 “오랜 정치의 갈래와 모순이 누적된 대폭발” 같은 견해는 사실적인 근거가 없다.
--- p.249

의를 흠모하여 죽음으로 명예와 절개를 지키며, 욕을 참고 중임을 져서 스스로 떨쳐 이름을 세우는 이 두 가지 상반된 한계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어렵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사마천은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더 무겁고, 어떤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 더 가볍다.”라는 표준을 제기하였다. 인생에서 가장 귀한 생명은 희생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발하게만 한다면 죽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사회에 공헌을 하여 후대 사람의 평가를 기다릴 수 없고 근근이 한번 죽음으로 암흑에 항쟁을 진행한다면 어찌 “아홉 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 잃어버리는 것과 같으니 땅강아지와 개미의 죽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란 것이 아니겠는가? 사마천은 욕을 참고 견디는 것과 생사의 고통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였으며, 침통한 가운데서 떨쳐 일어나 굳게 살아가며 최대의 굳센 의지로 『사기』를 완성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옛사람들을 끌어다 스스로를 비교하였다. 그러한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연마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공업(功業)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 p.263

『사기』의 문학성에 대한 인식과 부각은 역사상 점차 심화되어 가는 과정을 거쳤는데, 최소한 4개의 단계가 있다. 가장 광의의 문학성은 다만 『사기』의 문장이 간결하고 어사가 화미한 것을 채택한 것에만 착안하였는데, 이것이 첫 번째 단계로 위진 이전의 가장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사기』 산문의 성취와 예술 풍격미에 착안한 것이 두 번째 단계로, 당나라 사람들의 심화한 인식이다. 『사기』의 문장 구조가 곡절이 많고 파란하며 인물의 묘사에 소설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 세 번째 단계로, 명청 평점가(評點家)들이 많이 드러낸 것이다.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사마천이 역사 전기 인물의 전형적인 형상을 빚어낸 예술 기법을 드러낸 것이 네 번째 단계로, 근년에 와서 심화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 p.341

루쉰은 『사기』를 평가하여 “사가의 절창이요 운을 달지 않은 「이소」”라고 하여 이미 확고부동한 정론(定論)을 이루었는데, 문학과 사학 두 학계 연구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루쉰은 세 방면에서 『사기』의 문학성을 분석하여 “운이 없는 「이소」”라고 하여 충실한 논증을 제공하였다. 첫째, 사마천은 “분을 발하여 책을 짓고 의도가 절로 격하여” 역사를 쓰는 중에 자기의 사상 정지(情志)를 기탁하였다. 둘째, “천추에 기인을 전하였다.” 기인(畸人)은 곧 기인(奇人)이며, 바로 절행(節行)이 기이한 사람의 광휘가 빛나는 형상을 빚어내어 후세에 남긴 것이다. 셋째, “사법(史法)에 구속되지 않고 자구에 구애받지 않아 정으로 발하고 마음으로 거리낌 없이 문장을 지어” 뜻이 바로 이르고 정이 닿는 대로 문장을 구사하여 사법의 규범을 돌파하였으며 문채와 감화력이 풍부한 문장을 써내었다. 이 때문에 유협과 굴원, 가의 등등 각양각색의 인물 묘사는 선명한 개성을 갖추어 독자를 감동시켰다.
--- p.347

사마천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문장가를 중시하였는가? 그는 문사가 찬연한 작품은 작가의 심지를 기탁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세울 수 있고 후세에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보임안서」에서 말하였다. “제가 욕됨을 참고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면서 더러운 감옥에 갇혀 있는 것까지 달게 받아들인 이유는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다 표현해 내지 못하고 비루하게 세상을 떠나면 아름다운 문채가 세상에 드러나지 못할까 한스러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한 문채는 단순하게 문장의 사채(辭采)가 숙련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전기가 되는 문채(文采)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인물의 형상을 빚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사마천이 문사(文史)를 하나로 다룬 것은 우연히 음운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고심하여 조탁하고 장심으로 홀로 운용한 것이다. 사마천은 문학적인 기법으로 역사를 써서 『사기』의 문장이 찬연하여 볼 만하게 하였는데, 바로 자각적 창신이며 자각적으로 추구한 큰 열매이다.
--- p.359

사마천은 화를 당하여 인생세간의 고난을 맛보았고 운명의 장난을 깊이 느꼈으며, 비극적 화면을 운용하여 인생세간의 고난을 펼쳐 보여 사람들의 동정과 침통을 유발하였다. 백기(白起)와 몽염(蒙恬)이 죽음 앞에서 체념한 것이나 백이와 숙제, 굴원 같은 사람들이 도를 따라 죽으며 신음하는 것과 같은 것은, 격조가 잔잔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거대한 고통과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결코 의기소침해하지 않고 책상을 치며 떨쳐 일어나 자기의 인생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써 내려간 비극적인 주선율은 운명의 작용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각종 비극적 유형을 가지고 다방면의 인생 신념과 추구를 펼쳐 보였다. 공자의 그 불가함을 알면서도 하는 정신이 있고, 오기와 상앙, 조조의 사회의 변혁 때문에 역사라는 제단에 희생으로 바쳐진 정신도 있다. 범저와 손빈, 월왕 구천 같이 복수의 일념으로 한을 씻기 위해 욕을 견뎌내며 발분하는 정신이 있는가 하면, 항우와 오자서, 이광 같이 오만하게 죽음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없는 정신도 있으며, 자객과 유협의 폭력에 항거하는 정신 등등과 같은 것도 있다.
--- p.375

『사기』 중요 인물의 전기는 대부분 시간 순서에 따라 일을 기록하며 일생 일어난 일을 총괄하여 첫머리에서는 성명과 향리, 가계(家系), 생일을 쓰고 결미에서는 그 죽음을 써서 인물의 일생 동안의 언행을 수미가 완비된 이야기로 구성한다. 「항우본기」는 세상을 덮는 기개를 가진 영웅이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흥하였다가 망한 이야기를 썼으며, 「고조본기」는 포의로 제위에 오른 이야기를 썼다. 「이장군열전」은 이광이 때를 만나지 못한 이야기를 썼고, 「위기무안후열전」은 두영(竇?)과 전분(田?) 등이 서로 알력을 일으키는 이야기 등등을 썼다. 아울러 인물의 일생에서 언행이 발전해 간 줄거리 또한 스토리텔링화했다. 「이장군열전」에서는 이광이 흉노를 추적하며 독수리를 쏜 것과 죽은 척하여 험지에서 탈출한 것, 패릉위(?陵尉)를 참한 것, 우북평(右北平)에서 호랑이를 쏘아 화살촉이 (바위에) 박힌 것, 좌현왕(左賢王之)의 포위를 뚫은 것, 문서를 마주하지 않고 자결한 일 등 여섯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기술하여, 그가 일생 동안 “운수가 좋지 않아” 재주를 품고도 때를 만나지 못한 비극적인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염파인상여열전」에는 세 가지 이야기에 중점을 두었다. 곧 완벽귀조(完璧歸趙)와 민지의 회맹(?池之會), 그리고 가시나무를 지고 죄를 청한 것이다. 중간에 조사(趙奢)와 조괄(趙恬), 이목(李牧)의 사적을 끼워 넣은 것은 약간의 이야기로 분해할 수 있다. 사마천은 인물의 언행을 세부적으로 쓰면서 한 장면을 모두 이야기로 구성할 수 있었다.
--- p.390

사마천이 인물을 포폄하는 애증의 감정은 굴원의 「이소」 전통을 배우고 계승한 것 외에도 그의 생활 경력과 평탄하지 못한 처지에서 더욱 도움을 받았다. 사마천은 이십 세 때의 장유로 폭넓게 하층사회를 접촉하였으므로 『사기』에서 제후와 장상을 서술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많은 작은 인물을 서술하였다. 사마천은 이릉의 화를 당한 후 발분하여 책을 지었기 때문에 압박받는 국민을 동정하였으며 폭력 통치를 반대하였다. 정의를 찬미하였으며, 사악함을 저주하여 국민의 감정과 상응하였고 같은 기운을 서로 구하였다. 자객과 유협, 창우(倡優, 배우), 상고(商賈), 의복(醫卜) 등등 중하층 인물은 통치계급의 입장에서는 안중에도 없는 사회적 지위가 없는 시정의 보잘것없는 백성이지만 사마천의 필치하에서 그들은 전형적인 각 부류의 인물들이다. 그들은 우수한 품덕과 한 가지 기예에 빼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열정적인 찬송과 긍정을 받았다.
--- p.414

사마천은 통치 계급이 예의를 제창하고 방비함으로써 인욕을 막고 통제하는 시대에서 범속함과는 다르게 절로 하나의 격조를 이루었으며 인욕을 투시하는 다른 울림을 아뢰었다. 사마천은 이익을 좇고 부를 추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며 결코 무슨 사악함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속담을 인용하여 말하였다. “천하가 왁자한 것은 모두 이익 때문에 오는 것이고, 천하가 시끌벅적한 것은 모두 이익 때문에 가는 것이다.” 그는 날카로운 필봉으로 먹물을 듬뿍 찍어 힘차고 분방하게 사회의 이익을 좇는 한 폭의 그림을 묘사하였다. “낭묘에서 깊이 도모하고 조정에서 논의하는” 달관과 현귀, “신의를 지키고 절개에 죽으며 암혈에 은거하는” 청아한 선비는 모두 “부유한 데로 귀의하기” 위함이다. “청렴한 관리는 오래가고 오래가면 더욱 부유해진다.”는 말은 풍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적진을 허물고 적을 물리치는” 군사와 “(남을) 공격하여 빼앗고 몽둥이로 죽여 파묻는” 소년이며, “사지를 말이 질주하듯 달리는” 협사, “늙은이며 젊은이를 가리지 않는” 가기(歌伎), “모자와 검을 꾸미고 줄지어 수레와 말을 달리는” 유한공자, “맹수를 피하지 않는” 사냥꾼, “노름과 경마를 하는” 도박꾼, “문서를 뜯어고치고 법률을 곡해하는” 이사(吏士) 및 무당과 농부, 공상인(工商人) 등등 온갖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까지 재부를 추구하기 위하여 매우 분주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 p.477

『사기』는 고대의 가장 잘 갖추어진 전쟁사이다. 중국 고대 춘추전국 및 진초 과도기는 역사의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 장기적인 전란의 시대로 장장 5~6백 년이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약 18만 자에 지나지 않는 『좌전』은 춘추 242년간의 동란 및 전쟁을 550여 차례 기록하였다. 춘추의 다음은 전국시대로 원정을 하지 않은 해가 없었고 전쟁이 없었던 해가 없었다. 뒤이어 또한 진초 과도기의 대동란이 이어졌다. 수백 년에 걸쳐 갈수록 전쟁이 빈번해졌을 뿐만 아니라 규모도 갈수록 커져 춘추시대의 대전, 곧 진초(晉楚)의 성복(城?)의 전투, 진제(晉齊)의 안(鞍)의 전투에서는 쌍방 간에 출전한 병거가 이미 1~2천 승에 달하고 사졸은 1~20만으로 상당한 규모의 큰 전투였다. 그러나 이런 대전도 전국 및 진초 과도기의 대전과 비교한다면 다만 제대로 임자를 만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국시대 진(秦)과 조(趙)나라 사이에 벌어진 장평(長平)의 전투와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한 전투, 진초 과도기의 거록(巨鹿)의 대전과 초한의 성고(成?)의 전투는 쌍방 간에 동원된 직접 참전 병력만 백만을 헤아린다. 왕왕 전투가 수개월 내지 1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중국 안팎의 전쟁사를 통틀어서도 경탄할 만한 기이한 광경이었다. 장평의 전투는 전후로 8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 p.509

사마천은 농·공·상·우(虞)는 사회의 필연적 분업으로 하나라도 없으면 민생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사마천은 화식을 말하며 사회발전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본업으로 부를 이루는 것이 최상이고 말업으로 부를 이루는 것이 그 다음이며 간활함으로 부를 이루는 것은 최하이다.” 곧 농업으로 부를 이루는 것이 최상이며, 경상으로 부를 이루는 것이 그 다음이며 범법과 투기로 부를 일구는 것은 가장 나쁘다. 그는 또 「태사공자서」에서 「화식열전」을 짓는 목적을 설명하였다. “포의지사와 필부들은 정치의 해를 입지 않았고 백성들을 방해하지도 않았으며 때맞춰 취하고 주어 재부를 늘렸으니 지혜로운 자들은 그것을 취하였다. 「화식열전」 제69를 지었다.” 곧 상인이 착실하게 영업할 것을 계도하였으며 백분의 이십만 이익을 취하면 정치가 어지럽지 않고 백성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 했다. 국가는 그 자연에 응순하여 상업 및 백공과 기예인의 발전을 격려하여야 한다. 사마천은 그것을 일컬어 “따르는” 정책이라 하였다. 간교하여 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국가에서 가지런하게 바로잡을 것을 진행하고 교도하여야 하며, 보통 민중에 이르러서는 “세심하게 아끼고 힘을 쓰는 것이 생계를 도모하는 올바른 도리이다.”라고 하였다. 이 그림은 곧 사마천이 구상한 의리(義利)가 화융(和融)하는 이상적인 그림이며, 그것은 상품 경제에 대한 고찰에서 직감적으로 이끌어낸 민주적인 색채를 띤 유토피아이다.
--- p.553

사마천은 성패(成敗) 및 명성과 지위(名位)를 가지고 영웅을 논하지 않았고 역사에 공헌을 한 사람을 칭찬하였으며, 실패한 영웅에 대해서는 도덕이 더욱 주체적인 기준의 내용이 되었다. 전횡(田?)의 높은 절개와 정영·공손저구의 의, 백이·숙제 및 오태백(吳太伯)의 양보, 연릉계자(延陵季子)의 믿음,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 안영과 같은 이런 인물은 주로 도덕 정신으로 사림(史林) 편에 섰다. 역사에 기개 드높은 공헌을 한 항우는 강동(江東)으로 건너가려 하지 않고 장렬하게 자결하였는데, 일종의 투쟁 정신과 품덕을 몸소 보여주었다. 사마천은 시비가 선명한 필치로 중화민족의 미덕을 송덕하고 민족 성원 중의 악덕은 비판하였다. 곧 선한 것은 채택하고 악한 것은 폄하하여 한번은 바르게 한번은 반대로 심혈을 기울여 중국의 민족정신을 표현하였다. 중화민족의 전통적인 도덕관념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데 헤아릴 수 없는 작용을 일으켰다. 사마천은 부지런함, 검박함, 용감함, 지혜, 공정, 염결, 고상한 뜻과 수치를 아는 등의 미덕을 찬송하였다. 그는 포학함, 황음, 간사함, 각박함, 참소하고 시기함, 겁 많고 나약함 등 악덕을 비판하였다. 일반적으로 유가의 충효절의를 도덕의 표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사마천은 많은 방면에서 오히려 유가의 도덕적 울타리를 돌파하여 민주적이고 애민성이 있는 내용을 부여하였다. 자객의 폭력을 반대함을 찬양하고, 유협의 신의와 위급함을 부지하고 어려운 사람을 구하는 일을 찬양함은 성인과 시비가 같지 않다. 사마천의 전통적인 충효도덕에 대한 찬양은 그 내포하고 있는 것을 확대시켰다. 굴원의 충군에 대하여 사마천은 말하였다. “쫓겨나 떠돌아다니면서도 초나라를 돌아보며 회왕이 마음에 걸려 돌아가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임금이 한번 깨달아 풍속이 한번 바뀌기를 바랐다.
--- p.555

인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사마천은 사학과 문학에 고도의 통일된 전기문학을 창조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기』는 후세의 사전과 잡전(雜傳)의 창작에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후세의 소설과 희극 창작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사마천은 인물 형상 창작을 전형화하는 데 기초를 다진 사람이다. 사마천을 떠올리기만 하면 사람들의 뇌리에는 굴원과 위공자(魏公子), 염파와 인상여, 항우와 유방, 장량, 한신, 번쾌, 이광 및 형가와 섭정, 주가와 곽해 등 일련의 인물들의 형상이 떠오른다. 사마천은 “문장으로 일을 옮긴” 사람을 묘사하는 예술에 “문장으로 일을 내는” 후세의 소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며, 중국 소설이 서방 소설과는 다른 독립적인 특징을 갖추게 하였다. 중국 소설은 서사구조가 강하여 첫머리와 결미, 줄거리의 구성이 모두 사전의 특징을 띠고 있다. 이는 『사기』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역으로 『사기』의 몇몇 인물은 생동적 역사소설을 방불케 함을 느낀다.
--- p.618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사마천의 사상 및 사학 성취 방면에 불후의 가치를 천명하였다.”
- 장광쉐 (蔣廣學, 난징대학 중국사상가연구센터 교수)
“개척적이고 건설적이며, 독창적 견해를 갖춘 방대한 저작이다.”
- 자오지후이 (趙吉惠, 산시사범대학 역사학 교수, 중국역사문헌연구회 부회장)
“새로운 시각으로 중국사상가의 비림(碑林)에 사마천의 큰 비석을 세웠다.”
- 쑹솨캉 (宋刷康, 지린성 베이화대학 교수, 중국사연구회 고문)
“앞 세대 사람들이 미처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다.”
- 라이커홍 (來可泓, 상하이대학 문학원 교수, 중국역사문헌연구회 상무이사)

회원리뷰 (0건) 회원리뷰 이동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0건) 한줄평 이동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배송 구분 예스24 배송
  •  배송비 : 무료배송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반품/교환 안내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품/교환 방법
  •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쿠폰은 결제 시 적용해 주세요.
1   40,000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