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향한 도전
내가 청소년기에는 지금처럼 물자가 흔하지 않았음은 물론, 호구지책도 그리 녹록지 않을 때였다. 더구나 해외여행이란 극소수 특권층 외에는 먼 나라 사람들 이야기. 해외여행에 목말랐던 대중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준 사람은 우리나라 배낭여행의 선구자 김찬삼 교수였다. 그의 여행기는 당시 힘든 현실의 카타르시스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한없이 상상력을 키우던 나 역시 그의 여행기 애독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밤새워 탐독했고 몇 장 되지도 않은 사진을 아쉬워하며 보고 또 보곤 했다. 여행기를 읽을 땐 그의 궤적을 지도에 짚으며 따라다녔다. 세계 지도라 해봐야 나라 이름에 대도시 몇 개 표시되는 지리책에 딸린 ‘지리부도’였다.
그럴 즈음 자전거가 생기는 큰 행운이 찾아왔다. 중학생 때, 이태원 사시던 이모님의 선물이었는데 친구분이 미국으로 이주하며 주고 간 것이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감사의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돈암동 나의 집까지 달려왔고, 그날 밤은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자전거 가진 학생이 전교에 몇 명 되지 않을 때였으니까. 이 자전거로 통학도 하고, 집에 와서도 공부보다 더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다. 주말에는 영역을 넓혀 미아리 고개를 넘어 의정부, 광릉, 포천까지도 다녀오곤 했다. 지금처럼 자동차가 많지 않아 자전거 타기가 수월했고 비포장 구간이 많았지만, 흙먼지 뒤집어쓰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자전거를 반짝반짝 닦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암실 구멍에 새어 들어오는 한줄기 광선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한 생각이 있었다, 혼자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이렇게 되뇌어 보았다. “김찬삼 교수가 여행했던 먼 미지의 나라들을 나는 자전거로 가보면 어떨까…” 이런 역마살 DNA는 오랜 기간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간 간직했던 소중한 꿈의 실현은 가진 것의 포기와 희생을 요구했다.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버려야 함은 세상사의 자명한 이치. 평생직장을 그만두고 꿈을 실현하는 것이, 인생길에서 결코 뒤처지는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러나 가장의 역할을 팽개치고 무책임하게 꿈만 좇을 순 없어 가족에게 심경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아내와 아이들의 반응이 의외로 놀라웠다. “아빠가 우리에게 항상 꿈을 가지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아빠에게도 꿈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 꿈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사직서를 내고, 인생 후반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미국 서부 해안 종주 3,000km에 도전장을 던지다!
왜 인간은 항상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할까? 변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는 익숙한 상사(常事)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변화는 도전의 시작이다. 도전은 극복을 전제로 한다. 토인비의 말처럼 인생은 나이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도전의 결핍으로 사그라져 간다. 자전거 여행, 자유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자전거 세계여행의 첫 목표로 미서부 해안 길을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넓은 땅에서 좋아하는 바다를 원 없이 바라보며 마음껏 달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또 오랜 회사생활에 시달린 몸을 재충전하고 인내의 한계를 테스트해 보고 싶었다.
시애틀에서 3,000km를 달려 샌디에이고까지! 스스로 높은 목표를 설정해 30kg이 넘는 짐을 달고 하루 100km씩 한 달을 달려 목적지인 멕시코 국경에 우뚝 섰을 땐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두 번째 미국 여행에서는 서부 개척의 역사, 그 뒤안길로 사라진 인디언의 흔적을 찾아가는 횡단 여행이었다. 몬태나주, 와이오밍주, 콜로라도주, 다코타 주를 품는 대평원은 황량한 길의 연속이었다. 하늘과 구름, 비, 눈, 빙하, 강, 산맥 등 변화무쌍한 자연 앞에 자전거는 일엽편주나 다름없다. 마지막 미국 여행은 남태평양의 진주 하와이 제도. 마우이섬에 있는 해발 3,055m 휴화산 할레아칼라 정상까지 올랐다가 내리쏘는 짜릿한 60km 다운 힐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하와이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만 하는 사탕수수밭- 망국의 한을 품고 떠난 첫 이민 선조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자전거 여행의 의미를 더해 주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