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아가는 동안 바로 이러한 눈빛,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눈빛을 체득하길 간절히 바란다. 어쩔 수 없이 나의 눈빛은 타인에 대한 경계심과 의혹, 연민, 반가움, 무관심, 격려, 기쁨 등으로 순간순간 채색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그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내려놓지 않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나의 눈빛은 결국에는 넓디넓은 이해의 바다에 이르러 그 안에서 자유롭고 충만히 출렁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었고, 날마다 기도하며 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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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친구가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시끄럽고 번잡한 것을 피하고 홀로 있는 것을 즐기는 내 습성과 진득하게 한 사람에게 전폭적인 애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내 성격 때문인지 어린 시절에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얼마나 제멋대로였는지 친구가 아쉬운 줄도 모르고 오랫동안 살아왔다. 사람들끼리의 직접적인 부딪침과 잦은 교류로 가능한 친구 되기를 잘해내지 못하는 내게도 하느님은 다른 방식으로 친구를 만들어 주신다. 매일 아침 나를 깨워주고 잠들게 하는 해와 별빛, 계절에 따라 몸을 단장하고 생명의 기운을 전해 주는 주위 풍경, 책과 음악을 통해 가슴을 파고드는 작고 큰 만남과 그 파장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을 훈훈하게 데워 주는 고맙고 따뜻한 사람들, 신학적 사유의 지평에서 우연히 만나 길동무하게 된 이들, 이들이 모두 내게는 삶의 친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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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가족울타리 안에 갇혀있던 친구가 되는 힘, 그 사랑스러운 능력을 다시 찾고 회복시키자. 그리고 이웃 자매, 사회적 약자, 상처받은 자연, 만물의 친구가 되기 위해 길을 나서 보자.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다”는 바울 사도의 말씀(갈 3:28)을 묵상하다가 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종국에는 무엇이, 어떤 관계가 남을까요?’ 나는 잠시 후 다시 읊조렸다. ‘오직 그리스도의 친구들이 남을 것입니다.’
--- p.53
삶의 신비는 점점 더 자라고 그 속에서 나는 더 많은 선물을 발견한다. 지금껏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p.78
우리가 마음과 언어를 갈고 닦아 하느님을 자유자재로 부르고 경험할 수 있는 지경, 그 ‘자유’의 또 다른 얼굴은 ‘침묵’이다. 깊은 침묵 속에 뿌리내리지 않은 말은 하느님을 가리킬 수 없다. 그래서 ‘은유(언어)’와 ‘침묵’은 서로를 지탱해주는 친구이다. 혼자서는 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 그러니 이제는 침묵할 차례이다.
--- p.137
성서는 하느님이 베푼 잔치에 우리의 일반적인 통념과 예상을 뒤엎은 사람들로 채워졌다고 전한다. 그 식탁은 차별받고 소외받는 이들로 가득 찼고, 둘러앉은 모든 생명들의 조화롭고 평등한 어우러짐을 통해 세상의 온갖 차별과 편견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가장 포괄적이고 둥근 식탁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고 믿는 우리의 교회공동체라면 그렇듯 무한하게 펼쳐진 하느님의 포괄적인 식탁의 형상을 끊임없이 닮아가야 할 것이다.
--- p.154
소수의 용기 있는 선배들이 먼저 걸어갔고 분명 앞으로 더 넓고 덜 외로운 지경으로 나아갈 ‘여성’과 ‘목회’의 관계는 더 이상 망설임과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존재들과의 깊고 아름다운 ‘사귐’을 짓는 일이며, 무엇보다 여성들에게 생명을 사랑하고 돌보는 목회를 통해 내 안에 깃든 하느님의 형상과 빛을 되찾고 밝히라는 하나님의 간곡한 ‘부르심’이다.
--- p.192
오늘날 존재의 이름은 여전히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여성들과 타자들은 상처에 베이고 만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사람만이 또 다른 이름과 언어를 상상하고 부를 수 있다. 언어적 성차별의 관행을 뛰어넘는 것은 곧 다양한 타자들을 알아보고 각각의 존재를 불러들이는 일이다. 획일적이고 일반적인 언어 속에 묻히고 은폐되었던 존재들을 주님의 성례전에 초대하는 일이다.
--- p.239
시편
하느님은 내가 신뢰하는 강한 반석이시니,
내 모든 확신으로 그녀(her) 안에서 안식합니다.
내 어머니의 태속 깊은 곳에서,
그녀는(she) 나를 알고 계셨습니다.
내 손발이 생기기 전부터, 그녀는(she) 나를 갈망하셨습니다.
내 낱낱의 움직임을 그녀는 자비로이 기억하시고,
내가 아직 보이지 않을 때도, 그녀는 나를 상상하셨습니다.
--- p.283
오늘날 동물권 문제는 온 생명의 평화와 회복을 바라는 신적 요청이다. 점점 더 정교해지고 비가시화되는 동물 지배와 인간중심주의, 육식을 조장하는 지배 문화, 그것을 뒷받침하는 교회의 지배적 신앙과 신학을 깊이 자성하고 생명을 살리는 새로운 지혜에 우리를 개방할 때이다.
--- p.324
병원이 넘쳐날수록 인간은 병들어가고, 학교가 넘쳐날수록 인간은 우민화되며, 대량생산된 상품이 넘쳐날수록 인간은 궁핍해지고, 경제 성장의 환상에 발목 잡힐수록 인간은 도구화되고 무용(無用)해진다. 유용성의 ‘근원적 독점’ 현상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쫓겨나고 죽어가는, 여전히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다시금 무용지용(無用之用)을 생각한다. 그 첫걸음이 황금률이 아닐까.
--- p.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