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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 국가 위치를 찾다 5

우리 고대 국가 위치를 찾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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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2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456쪽 | 638g | 152*224*30mm
ISBN13 9788959595723
ISBN10 8959595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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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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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서 왜곡 기록에 대하여]

【사료24】『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고구려전’

安帝 永初 5년(A.D.111; 高句麗 太祖王 59)에 宮이 使臣을 보내어 貢物을 바치고 玄?에 예속되기를 求하였다.

【사료23】『삼국지(三國志)』〈위서〉「동이전」‘고구려전’

?帝와 安帝 연간에 [高]句麗王 宮이 자주 遼東을 침입하였으므로, 다시 玄?[郡]에 속하게 하였다.

【사료329】『자치통감(資治通鑑)』卷四十九 漢紀四十一 孝安皇帝

○ (永初五年(111) 三月) 夫餘王寇樂浪. 夫餘爲寇始此. 夫, 音扶. 樂浪, (音洛琅.)高句驪王宮與濊貊寇玄?. (句, 如字, 又音駒. 驪, 力知?. 濊, 音穢. 貊, 莫百?. ?, 同都?.)

부여왕이 낙랑을 노략질했다. 고구려왕 궁(宮)이 예맥과 함께 현토군을 노략질했다.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이 우리 고대 국가에 대한 중국 측 사서의 왜곡 기록과 이를 인용하여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상의 인식 태도 및 부족 그리고 이에 대한 우리 강단 사학계의 해석에 있어서의 민낯과 더 나아가 주류 강단 사학계의 기본 논리 조작을 알 수 있는 좋은 표본이다. 고구려 태조대왕 59년(111) 사건에 대해 중국은 원 사서는 물론 후대의 이에 대한 주석도 왜곡 조작하였다.

고구려 태조대왕 59년(111) 고구려가 어이없게 갑자기 현토군에 속하기를 요청하였다는 기사이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와 현토군 등 한나라 군현들과의 관계 상황에 있어서 고구려와 한나라 군현들이 하북성 내지는 요령성 소재 여부를 떠나서 있을 수 없는 이상한 내용이다. 당시 『삼국사기』의 편찬자들도 이것을 의식하였는지 주요 인용하는 중국사서 『후한서』의 기록 외에 다른 사서인 『(자치)통감』의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 즉 고구려가 예맥과 함께 현토군을 침입하였다는 전혀 다른 기록을 확인한 후 부속 기록을 남겼다. 어느 하나는 잘못이고 어느 하나는 맞는 기록일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선 『삼국사기』의 기록상의 인식 태도 및 인식 부족을 언급하고 다음으로 중국사서들의 사서기록 왜곡에 대하여 언급하고 다음 비판을 진행하고자 한다. 두 사서의 이 사건 기록만 서로 다르다면 이러한 판단과 이 판단에 의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어쩔 수 없다. 주요 인용 사서를 우선 기록하고 부속 기록에 의견을 붙였다. 하지만 이 사건과 관련된 다른 기록이 있고 이 기록들은 『통감』의 기록에 더 신뢰가 확실히 간다면 주요 인용 사서라 할지라도 『후한서』의 인용을 배제하고 다른 기록인 『통감』의 기록에 따라야 한다. 이러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기록이 같은 해 당시의 주요 인용 사서이자 신빙성 없는 기록을 한 당해 사서인 『후한서』의 또 다른 기록에 있다. 즉 위의 기사는 ‘고구려전’이고 다른 기록은 ‘부여전’이다.

【사료67】『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부여(夫餘)

安帝 永初 5년(A.D.111; 高句麗 太祖王 59)에, 夫餘王이 처음으로 步兵과 騎兵 7~8千명을 거느리고 樂浪을 노략질하여(註 046) 관리와 백성을 죽였으나, 그 뒤에 다시 歸附하였다.

註 046
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樂浪 : 『後漢書』 「光武帝紀」에는 ‘夫餘夷犯塞 殺復吏人’이라고 하여 樂浪을 塞로만 기술하고 있어 樂浪을 玄?의 잘못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李丙燾,「夫餘考」p. 219) 이를 樂浪郡의 遼東說의 중요한 근거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리지린,『고조선연구』) 이는 後漢의 쇠퇴와 高句麗·百濟의 흥기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遼東지역에 후퇴한 樂浪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된다. 한편, 本文의 ‘始’를 夫餘王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千寬宇,『人物로 본 韓國古代史』p. 85)
≪參考文獻≫
『後漢書』卷1「光武帝紀」1 下.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사회과학원 출판사.
李丙燾,「夫餘考」 『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千寬宇,『人物로 본 韓國古代史』1982.

다른 기록인 ‘부여전’에는 부여가 낙랑을 공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 기사에 의하면 부여가 단독인지 아니면 고구려와 연합 내지는 사주에 의한 것인지 모르나 부여가 낙랑을 공격하자 고구려도 현토군을 공격하였다.

낙랑군에 대한 부여의 공격 기록은 낙랑군이 한반도에 없음을 입증한다. 그러므로 이 기록에 의하여 고구려가 현토군에 속하기를 요청한 기사보다는 부여가 낙랑을 공격한 틈에 고구려가 현토군을 공격한 사실이 더 신빙성이 있다. 더군다나 이 사건 전후에 고구려는 요동 및 한나라 군현에 대한 침략이 이루어지던 상황이었다. 7년 후에도 똑같이 예맥과 함께 현토군을 공격한 사실도 있는 것은 이러한 신빙성을 더해 준다.

【사료289】『삼국사기(三國史記)』卷第十五 ?句麗本紀 第三 태조대왕(太祖大王) 66년 6월

한의 현토군과 화려성을 공격하다 (118년 06월(음))

〔66년(118)〕 여름 6월에 왕이 예맥(穢貊)과 함께 한의 현토군을 습격하는 한편,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국가사업인 사서를 편찬하는 사람들이 몰랐다는 것은 상식 밖으로 이러한 예는 수없이 발견된다. 그리고 중국사서의 경우 소위 중국의 ‘춘추필법’이 심하게 적용된 『후한서』와 출처와 신빙성이 의심되는 『위략』에 의하여 전적으로 기록된 『삼국지』의 왜곡성을 감안하고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해석하여야 하는 것으로 맹종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는 중국사서의 이러한 점과 『삼국사기』의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역사를 해석하여야 한다. 무조건 맹종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불신해서도 안 되지만 철저한 분석에 의하여 냉정하게 여러 가지 상황과 객관적인 근거를 종합, 판단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항을 본 필자와 같이 아마추어인 유사, 사이비 학자도 파악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우리 주류 강단 사학계의 의견 즉 우리나라 사학계의 통설을 살펴보자. 해방 후 77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일제 식민 사학자 이병도의 연구를 따르고 있고 본 필자와 같은 연구가 없는 것이 위의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삼국사기』 태조대왕 59년조(111)에 대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상의 주석인 註 001상의 현토군 위치 및 이동의 왜곡사항은 그만두더라도 註 004 사항을 보면 역시 이병도의 논리, 주장을 실었다. 물론 이후의 다른 논리와 주장도 실었으나 이병도의 논리, 주장이 해방 후 77년이 지난 이후에도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이 현재의 우리 주류 강단 사학계이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주로 인용하는 중국사서 『후한서』의 기록을 그대로 실으면서 『통감』과의 기록 차이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이병도가 『삼국사기』가 언급한 사항을 인정하고 『통감』 기사의 신빙성을 더 높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병도와 식민 사학자들은 중국사서의 내용에 있어서 우리 고대 국가의 불리한 사항을 더 신뢰하거니와 이와 관련된 『삼국사기』의 기록을 불신하는 것이 상례로 행하여져 왔는데 특이하게도 이번 경우는 다르다. 그런데 그 다음 『후한서』의 다른 기록인 ‘부여 편’ 기록에 대한 이병도의 논리와 주장을 보면 이 의아스러운 것이 해소되어 그들의 통상적인 역사 인식 및 왜곡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삼국사기』가 판단을 못 내리고 의심한 원래의 기록인 『후한서』 ‘고구려 편’과 상반된 『통감』의 기록을 이병도가 신빙성 있게 평가한 이유가 밝혀진다. 즉 부여가 낙랑을 공격하였다는 『후한서』의 다른 기록인 ‘부여 편’ 기록을 다른 기록인 『후한서』 ‘광무제기’를 들어 부여가 낙랑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현토(군)를 공격한 것이라고 결국은 『후한서』 ‘부여 편’을 우선 부정하고, 이에 따라 『후한서』 ‘고구려 편’과 상반된 기록인 『통감』 ‘고구려 편’상의 고구려가 현토군을 공격하였다는 것을 부정한 채, 이는 부여가 (현토)공격한 것이라는 논리를 세운 것이다. 이렇게 논리를 세우려고 『삼국사기』가 의심스러워했던 것을 인정하는 한편 『통감』의 ‘고구려 편’에 신뢰를 두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병도는 자기들의 식민사학 논리를 위하여 『삼국사기』에 신뢰성을 두는 척하면서 결국 우리 민족국가에 유리한 반면, 자기들의 식민사학 논리에 불리한 사항 즉 부여는 낙랑을 공격하는 사이에 고구려가 현토군을 공격하였다는 중국사서의 기록을 부정까지 하였다. 즉 부여는 낙랑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현토군을 공격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가 현토군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세웠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중국사서의 기록을 무리하면서까지 부정하거나 다른 식으로 해석하였을까.

그것은 간단하면서도 무서운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즉 일제 식민사학과 이를 그대로 추종하는 주류 강단 사학계의 논리대로라면 한반도 평양에 낙랑군이 있고 그 위에 압록강 북부 길림성 집안시에 고구려가 있고 그 위에 부여가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현토(군)는 고구려 남쪽 낙랑군 북쪽에 있다가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가 다시 혼하강 유역으로 옮긴 상태이다.

이러한 비정에 의한다면 부여가 현토군을 공격하는 것은 가능한 사실이나 낙랑군을 공격하는 것은 중간에 고구려가 있어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이러한 사건을 기록한 중국의 위와 같은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부여가 낙랑을 공격하자 고구려가 현토를 공격하는 상황이 되는 것인데 이러한 상황이면 고구려와 부여 그리고 낙랑과 현토의 위치가 가깝게 있으면서 주류 강단 사학계가 그 위치를 한반도 등에 비정한 상황과 맞지 않게 된다. 즉 원래의 하북성에서의 제대로 된 위치 비정에 의하면 고구려 서쪽에 현토군이 있고 그 동북쪽에 낙랑군이 있고 그 북쪽에 부여 즉 북부여가 있다. 따라서 낙랑 북쪽에 있던 부여가 낙랑군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하고, 고구려 서쪽에 있었던 현토군을 고구려가 공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이러한 관계로 ‘낙랑군 한반도설’이라는 일제 식민사학 논리를 비판하여 반대한 북한의 리지린 교수는 이것이야말로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없었다는 증거라고 하였다. 과연 이 주장은 사실이었다.

여기서 살펴보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 그것은 여러 중국사서는 물론 『삼국사기』 편찬자들 그리고 일제 식민 사학자와 이를 그대로 추종하는 주류 강단 사학계도 역사 인식의 한계 내지는 오류를 공통적으로 범하는 있다는 사실이다. 즉 고구려가 현토군에 속하길 원했다는 구절이다. 이것은 본 필자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구려와 고구려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돈함에서 온 사항이다. 즉 중국사서상에 애당초 고구려가 현토군에서 건국된 것으로 착각하여 현토군에 고구려현을 둔 것처럼 현토군과 관련된 것은 모두 고구려로 착각하여 고구려를 현토군의 일개 현 소속 내지는 그곳에서 자라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현토군 고구려현과 관련된 것은 고구려와 다른 구려이다. 모두 고조선 휘하 집합체였으나 엄연히 다르다. 반면에 고구려는 대국으로써 독립적인 국가의 형태를 가진 집합체였던 반면, 구려족은 예맥족으로 중국사서상의 소수맥의 본류이다. 이를 착각하여 구려족이 현토군에 속하기를 원하거나 속한 것이지 고구려국이 현토군에 속하기를 원하거나 속한 것이 분명히 아니다.

중국사서가 구려와 고구려를 혼돈하여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구분하여 기록한 것을 후대 사람들 특히 일제 식민 사학자나 주류 강단 사학자들이 왜곡하여 해석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다음 기록이다.

〈이하 생략〉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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