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관계는 두 남녀가 중심이 되어 꾸려야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물론 당사자의 뒤에 자리 잡고 있는 부모님과 형제자매를 완전히 도외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들이 주역 자리를 꿰차서는 절대로 건강한 관계를 오래 지속할 수 없다. 남편과 아내가 오롯이 주연배우로 채워야 할 무대에 조연과 엑스트라가 지나치게 큰 비중을 차지하면 그 영화는 흥행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돋보여야 할 주연배우들의 분량이 너무 줄어들어 주연 남녀의 서사가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조연의 들러리처럼 본 말이 전도되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가 감지됐을 때 상황을 바로잡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결국은 문제가 계속 커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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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과 남편에 대한 정서계좌가 텅텅 비어있었기 때문에, 남편이 따뜻한 내 모습을 기대할 때도 내 정서계좌에서 인출할 배려와 위로잔고는 더 이상 없었다. 남편이 가장 다정한 나를 필요로 할 때,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냉정한 모습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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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씌어놓은 희생자 올가미에서 벗어나 조금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마흔 넘어 인생 하프를 지나온 이들 중 나름의 사연이 없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 동료 중에도 나처럼 돈 안 버는 남편과 함께 사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한 동료는 남편의 건강이 악화되어 퇴근 후에는 남편 수발까지 들어야 했다. 그 동료에 비하면 나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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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사는 데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미리 정해둔 모범답안지가 인생 정답이라고 여겼다. 예정해둔대로 삶의 여정을 꾸리 고 싶었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으니 내 인생이 ‘틀린’ 것만 같았고, 이렇게 오답 인생을 자초한 남편은 개선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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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의 다른 문화 속에서 자라온 우리 부부는 꿈꾸는 ‘이상적인 지출’ 에 대한 지향점이 달랐다. 부부 간 갈등의 근원을 찾아가다보면 이렇게 본가에서 겪은 서로 다른 경험이 원인이 되어, 각자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상이한 가치관을 갖게 된 경우가 많다. 부부가족 전문 상담사가 쓴 책에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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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의 기준을 외부에 두면 적당한 수준으로 삶을 즐기기가 어렵다. 타인과 경쟁하는 삶에서는 어쩔 수 없이 승자와 패자가 나뉘기 때문이다. 삶의 지향점을 바라보는 눈길을 외부가 아닌 내 자신으로 돌려야겠다고 마음먹으니 내 삶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동안 비참하게만 느껴졌던 내 인생이 사실은 그렇게 나쁜 조건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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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위, 매월 주기적으로 통장에 들어오던 월급 등 '파워'를 갑자기 상실한 남편을 그동안 너무 옥죄어온 게 아닌가 싶다. 나의 세계와 남편의 세계의 교집합을 키우기는커녕 나는 지금까지 그의 세계의 여집합에 나만의 세계를 더욱 공고하게 지어가고 있었던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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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닌 가치관과 인생관만이 ‘옳다’라는 독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코 부부관계가 원만할 수 없다. 서로가 비정상이라며 손가락질만 하는 관계는 건강하지 못하다. 서로를 비방하는 두 사람이 만나서 빚게 될 부조화는 안 봐도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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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평균의 함정’과 마찬가지로 부부관계에도 ‘정상의 함정’이 있는 것 같다. 다양한 부부들 관계 속에서 보이는 모습들을 대충 평균치해서 이게 바로 바람직한 ‘정상 부부’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만, 과연 이게 모두가 동의하는 모습일까? 부부의 모든 관계 단면에 있어 ‘정상’이라는 것을 모두 갖춘 ‘완벽한 부부’가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어차피 모두가 수긍
할 수 있는 100% 정상 부부가 존재할 수 없다면, 어느 모습의 부부라도 그들이 서로 만족하면서 결별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만 내닫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충분히 지속 가능한 사이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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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도 못 바꾸는데 어떻게 배우자를 바꿀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불행하게 사는 게, 부족하고 못난 배우자를 만난 탓이라고, 늘 남 핑계를 입에 달고 살면 예속된 관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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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히는 순간, 부부 관계가 어려워질 수 있다. 부부 간에도 원만한 사이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내가 알고 있는 상대방의 모습이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는 섣부른 생각도 하지 말자. 배우자가 원치 않는데 삶에 깊이 관여해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만 늘어놓는 경계 없는 관계보다는, 상대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따뜻한 마음과 시선을 건넬 수 있을 정도의 시크한 거리를 둬야 부부 간에도 건강한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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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밖으로 보여 지는 표면과 그 안쪽 눈에 잘 띄지 않는 이면이 있다. 배우자를 싫어하게 되면 그가 가진 특성 중에 부정적인 면이 자주 눈에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도드라지는 표면을 뒤집어 살펴보면 뒤쪽 면에는 내가 미처 깨닫기 못했던 긍정적인 성향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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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데 없는 불평을 하지 않으려 말을 아끼며 보내는 날이 많아지자 이제 어느 정도 잔소리 컨트롤 능력치가 쌓이는 듯 했다. 바야흐로 단계를 높일 때가 된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일일이 지적하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슬쩍 알려주는 걸로 전환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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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부부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열정’이라는 뜨거운 단어보다는 ‘정’과 ‘의리’, ‘동지애’라는 단어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스킨십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연령대가 아니니, ‘노력’이 필요한 시기다. 적극적인 스킨십을 유도하기 위해 얼마 전 남편 생일에 스킨십 쿠폰을 선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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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배우자가 되기 위해서는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부부가 함께 고난을 이겨내고 역경을 견뎌내는 큰 시련을 함께 하며 이 축적의 시간이 더욱 농밀해진다.
신혼 때 깨 볶으며 살던 부부 상당수가 이혼에 이르는 걸 보면 무조건 시간이 흐른다고 서로에 대한 관심과 열정, 애정이 쌓이는 게 아니란 건 분명하다. 서로를 알기 위해 노력하고, 이해하기 위해 한 발짝 떨어져서 관조하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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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적당한 포기도 아니고, 적당한 희생도 아니었다. 이렇게 자신을 지워버리는 삶은 결혼이 아닌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건강하고 지속적인 관계로 이어질 수 없다. 결혼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 함께 하는 하나의 관계에 불과하다. 물론 매우 중요한 관계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의 삶을 오롯이 살아나가는 것이다. 내가 좀 더 나은 이로 거듭나기 위한 삶의 여정에서 배우자는 자주 등장하게 된다. 가끔은 함께 걷기도 하고, 가끔은 저 멀리 내 앞에서 달리기도 하고, 또 가끔은 다른 길을 한참 걷다가 내 옆으로 살며시 다가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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