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나이 들었으나 남편과 자식이 없는 여자들’은 ‘독녀’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관리 되었어. 현재 비혼, 미혼, 독신 여성들이지. 그녀들은 유교 국가에서 왕이 백성이 잘 다스리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특별하게 배려해주어야 하는 대상이었어. 하지만 그 구분이 모호하기도 했지. 승정원 일기에 따르면 독녀들은 20대, 30대의 젊은 나이인 사람들도 많았으며, 반드시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존재가 아니기도 했거든. 불쌍하고 약한 존재가 아닌 과도하게 자기 이해에 밝고, 국가의 금제를 어기고, 왕에게 거침없이 격쟁하는 등 ‘외람’된 행동을 했다는 기록이 많아. (이하생략) 그녀들은 의지할 곳 없이 가난하고 불쌍한 존재여야 하는데 실상 기와집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고, 노비를 거느리기도 했어.
--- 「독녀」 중에서
검녀에 등장하는 몸종의 사연도 독녀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어. 검녀에 등장하는 양반집 딸은 부모의 원수를 갚은 뒤에 자결하기 전에 그 몸종에게 이런 말을 남겼어. “나를 묻은 다음에 나라를 두루 돌아다녀 보아 뛰어난 선비를 택하여 그의 처나 첩이 되어라. 너역시 기이한 포부와 걸출한 기상이 있는데 어찌 평법한 남자에게 머리를 숙이고 고분고분 살겠느냐? 이후에 그 몸종은 장안의 기사라고 소문 난 소웅천을 찾아가 스스로 소실[첩]이 돼. 하지만 그녀는 그 인물이 전혀 자신의 배필이 될 만하지 않다고 스스로 판단해 스스로 떠나기로 했어. 그리고 소옹천에게 이렇게 말을 해. “선생이 기사가 못 되는 줄 알면서도 억지로 모신다면 나 자신의 소망을 저버리는 것이고, 아울러 소저(양반의 딸)의 당부를 어기는 것입니다. 나는 내일 새벽에 떠나겠습니다. 먼 바다와 조용한 산에서 노닐렵니다. 남장을 그대로 두었으니 가뿐히 갈아입고 나설지라, 어찌 다시 여자로서 음식을 장만하고 바느질하는 일에 얽매어 지내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검술을 보여준 뒤에, 이튿날 새벽에 남장을 하고 떠났지. 이야기는 “아득히 그 행방조차 알 수 없었다”라고 마무리 돼. 행방을 알 수 없는 그녀가 또 다른 남자들 만났을 것 같지는 않아. 아마도 어딘가에서 ‘독녀’로 살아갔을 것 같아. 그녀는 스스로 혼인의 경계를 넘어들지. 남자를 골라 그의 첩이 되는 길을 선택해. 첩이 된 뒤에 다시 그를 떠나기로 결정하기도 하고, 어차피 정실부인도 아니었기에 이혼도 아니니깐. 혼인을 했었기에 처녀도 아니고 남편이 죽은 것이 아니므로 과부도 아니야. 그녀들을 어떤 범주 속에 묶어내기 어려워.
--- 「독녀와 관련된 일화」 중에서
현대 국어의 여성 명칭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여교사, 여검사, 여의사, 여교수 등은 현대 사회가 부계중심, 남성 중심의 사회임을 잘 말해준다고 생각해. 하지만 고려시대 말, 조선시대 초에는 여성 명칭어에서 단어 앞에 ‘여자’라고 덧붙였던 점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당시에 남성과 여성의 역할 분담이 확실했다는 것을 말해줘. 당시의 사회가 부계중심이 아니었다는 점을 짐작해볼 수 있어. 여자 승려의 명칭이 여승이 아닌 ‘승’이였다는 점만 보아도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어. (남자 승려는 ‘즁’이라고 불렀어.)
--- 「승려」 중에서
시집간 딸은 가족이 아니라 남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으로 이 말은 조선시대 후기에 자주 쓰던 표현이야. 유교가 지배한 조선시대 말에는 철저히 남녀차별을 했어. 그래서 여성을 차별하는 다양한 제도가 존재했고 그러한 내용을 전하는 표현 또한 많아. 이 말도 그런 것이지. 여자는 혼인하면 더 이상 친정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친정에 발도 들여놓으면 안 된다는 말도 많이 했어. 호주제가 폐지되고 시부모와 친정부모를 같이 대우하는 요즘 시각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표현이야.
--- 「출가외인」 중에서
여자가 시집가서 시집식구들과 함께 살면서 심신 양면으로 겪는 고된 생활을 말해. 오늘날 여권이 신장되고 점차 핵가족의 추세로 나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실감조차 나지 않는 퇴색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짐지만, 이 시집살이 때문에 우리 할머니·어머니들은 많이도 울고 한숨짓고 쫓겨나며 심할 때는 스스로 목숨까지 끊기도 했어. 그것은 옛이야기 삼아 실토한 할머니들의 경험담으로써 또는 문학작품, 오랜 세월 동안 전승되어온 우리 주변의 전설·민담·속담으로써 막연하나마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시집살이’란 한마디로 말하여 봉건시대의 유물이야. 따라서 요즈음에도 ‘시집살이’ 하면 고되고 어렵고 구속이 심하고 지긋지긋하도록 부자유한 생활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어. 일이 힘든 데다가 윗사람의 잔소리가 심하면 ‘시집살이가 심한 직장’이 되고, 늘그막에 몸이 고된 처지가 되면 ‘늘그막에 된 시집살이 만났다.’고도 해. 또 자녀들이 까다롭게 굴면 젊은 엄마는 ‘애들이 시집살이 시킨다.’고 푸념하기도 하지. 한편 시집살이와 대비되는 것이 ‘처가살이’라고 해. 처가살이에는 두 가지의 경우야. 아들이 없어 양자삼아 데려다 함께 사는 데릴사위의 경우와 생활력이 없어 처자식을 데리고 처가에 들어와 얹혀사는 경우지. 그런데 이 처가살이는 모계사회의 잔재로서 일정한 기간 동안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 사는 이른바 ‘남귀여가(男歸女家)’의 혼인형태와는 달라. 또 앞에 말한 ‘데릴사위’같이 여가(女家)의 필요에 의해 사위를 들여 사는 경우와는 달라. ‘시집살이’의 대가 되는 ‘처가살이’는 남자가 무능해서 처가에 얹혀사는 경우를 말해. 딸은 출가외인(出嫁外人)인데 외인이 못 되고 다시 들어왔으니, 그 남편인 사위는 주변머리 없고 면목 없는 무능한 존재가 되는 거야. 따라서 시집살이가 고된 생활인 데 반해, 처가살이는 치사하고 굴욕적이고 눈칫밥 얻어먹는 신세라 할 수 있어. 고생의 대명사 같은 ‘시집살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생겨났으며, 왜 근래까지 500년 이상의 장구한 생명을 유지해왔을까? 그 이유는 당연히 조선시대의 배경에서 찾아야 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집살이는 봉건사회의 부산물로서 철저한 남존여비와 효도지상의 유교윤리, 그리고 가난과 조혼의 풍습 등 사회적 병폐 속에서 생겨났어.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게.
--- 「시집살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