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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2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184쪽 | 204g | 125*200*11mm
ISBN13 9791192333656
ISBN10 119233365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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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늠할 수 없이 긴 식탁 위에
잔 접시 나 나이프 포크 너
늘어져 있다

나와 나이프는 조금 가깝고
너와 잔은 아주 멀다 그리고
우리는 마주 보고 있다
서로 알고 있는 서로를 매 순간 흘려보내면서
아주 오래된 친구라는 확신을 가진 채로
그사이

돼지가 지나간다

지나는 게 중요해, 간다는 게 중요해?
질문할 수 있다는 건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식탁보 대신 나의 일생을 깔아 놓고
그 위에서 만찬 혹은 손가락을 빨자 비로소

정물로서의 나와 생물로서의 나이프
그렇다면

돼지가 지나가고 있다
---「텐션」중에서

우리는 앞을 보며 걷는다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는 줄도 모르고
옆을 잊은 채

오늘 저녁은 무얼 먹을까
서로가 떠올리는 식탁에는 의자가 하나뿐이고

어느덧 너는 저만치 앞에 서서 걷고 있다

기묘한 고요

뒷모습을 바라보는 건 지겨운 일이야
불현듯 희미하게 네 허밍이 들려오고

지긋지긋한 사랑을 하는 연인의 모습을 위해서
우리는 많은 시간과 상상이 필요했지

색이 바랜 벽돌도 벽돌이듯이
아주 오래된 연인인 우리는

공원에서 만난다

공원에는 혼자 걷는 사람들이 많다
---「공원에서의 대화」중에서

애인이 집으로 왔다
나갈 땐 죽을 것처럼 울더니 살아서 돌아왔구나

네가 없는 빈방에서 소리가 났는데

몸살이 났다
몸에 살이 나면 원래 아픈 건가

우리는 하나의 소파를 나눠 쓰고
나는 자꾸만 등 쪽이 서늘해진다
가 닿을 수 없는

애인의 손과
어제 없는 미래

우리는 소파의 끝에 각각 앉는다
이쯤에서 애인은 꽃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해를 바라보면 해바라기고 달을 맞이하면 달맞이라고
나는 그런 꽃의 충성심이 무섭고

살이 자꾸만 난다
살이 몸이 된다는 건
소리에 목메는 것과 같고

애인은 소리 없이 웃는다

한쪽이 정서면 다른 한쪽은 서정이다
둘은 한집에 살고

소파는 이 집 중심에 있다
---「정서와 서정」중에서

당신이 없는 곳으로부터 당신이 태어난다
간단하다,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 시작되고
나는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배고프다, 중얼거리면
불투명한 얼굴로 식탁 위에 솟아나는 당신, 당신들

침 속에 고여 있는 투명한 시간
차가운 접시 위
연기처럼 새어 나오는 불가능이란 말이 좋아

당신에겐 사랑이 불가능해서 나는 꿀 수 있는 꿈들만을 꾸고
잠들 수 없는 밤이 계속돼서 나는 사랑하는 척을 했다

잊었어? 우리에겐 약속이 있잖아
개의 꼬리같이 쉽게 흔들리는
---「카니발리즘」중에서

두 사람이 내게 방향을 물었다 나는 등을 돌렸다
그들은 나를 등지고 걸어갔다

나는 양을 치고 있었다 양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까지 세다 그만두었다 내가 가진 손가락이 그게 전부여서

가진 것 이상을 탐내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울타리는 견고했다

열 마리의 양이 내 앞을 왔다 갔다 했다 그중 한 마리가 유독 어리고 하얘서 시선을 사로잡았다 흰 양은 내 앞에 가만히 엎드렸다 미동도 없이

눈을 뜨고 있었는데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양들을 울타리 쪽으로 몰았다 새하얀 양은 홀로 빛났다
---「터닝 포인트」중에서

지도에는 숲의 샛길만이 그려져 있다. 여기는 반듯한 도시고 매끄러운 도로뿐이다. 너는 능숙하게 차를 몬다.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은 이쪽이 아닌 것 같은데…….

백미러를 흘끗 쳐다본다. 우리가 지나온 길 위로 많은 것들이 떨어져 있다. 트렁크가 다 안 닫혔나 봐. 너는 말이 없다. 도로가 갑자기 울퉁불퉁해진다.

차 좀 세워 봐. 너는 액셀을 밟는다. 유리창에 돌이 튄다. 창밖의 풍경이 직선으로 번진다. 어지러워……. 네가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몸이 앞으로 쏠린다. 땅엔 우리의 짐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다. 하늘은 청명하다. 나는 차에서 내려 흘린 짐을 하나씩 줍는다.

차와 점점 멀어진다.

풍경은 천천히 흐른다. 떨어진 짐을 다 줍고 다시 차로 향한다. 걸어도 걸어도 차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짐을 들고 길을 잃는다. 정처 없이 걷다가 짐을 내려놓고 숨을 돌린다. 황무지 저 멀리 너의 차가 보인다.

나는 짐을 두고 차로 향한다. 조수석에 올라탄다.

운전석에 네가 없다.
---「더 로스트 드라이브」중에서

눈이 내렸다 우리는 사막에서 하염없이 걷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쌓였다 허리께까지

정도를 모르는 것 같아 네가 주저앉으며 말했고

나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모른다는 것의 확실함과 아는 것의 희미함 사이에서

그만 가 모래알처럼 버석거리는 목소리로 너는 내 발목을 잡았고 나는

무엇이든 혹사시켰다 잘 알려면 그래야 했다 나는 좀더 가 볼게 눈을 헤치며 걷는데

눈은 녹지 않고 너는 자꾸만 가라앉고 내 발목은 닳아 갔다
---「우리의 오해는 영원히」중에서

나와 너라고 하자, 우리라는 죽은 단위는 버리고
깨진 사탕 파편으로 이를 닦자, 썩은 이로 좀 더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자, 질문해 보자
왜 먼 훗날만을 생각하며 가까이에 두려고 하는지?

중요한 것은 방아쇠를 누가 당기느냐가 아니라
방아쇠는 당겨지게 되어 있다는 거야

썩은 과일을 만져 보자, 그 감각은
과거의 것? 현재의 것?

확실한 건 오직 외운 것들
살생부에 적힌 것
나와 너, 나와 너, 나, 너, 나, 너, 나너나너나너나너
---「앙팡 테리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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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은의 시를 열고 들어간다. 분명히 웅덩이에는 물이 없는데 이상하게 온몸이 젖고, 상상만으로도 비가 내리고, 품은 적 없는 씨앗이 희망처럼 내 뺨을 열고 자라난다. 순식간에 무성한 숲. 숲이 만들어내는 그늘 아래 가만히 눈을 감으면 어디선가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의 눈감음을 사랑한다”(「제이에게」)고. 지금 목이 너무 마른 것은 더 자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뜻하는 말이라고. 그 목소리를 따라가면 안지은은 내게 끈덕진 사랑의 장면을 펼쳐 보인다. 그것은 이를테면 우박이 비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남는 것은 자세뿐일지라도 기꺼이 정물의 자세를 기르며 한 뼘 나아가는 것. 그 풍경 속에 있노라면 어느덧 깊은 어둠 속에서도 밝은 시야를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자라게 된다. “나는 모두를 사랑한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라온빌」)이라는 그녀의 말이 진실로 다가오는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 정다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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