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 뼛속에 가두어 둔 아버지의 환상이 배신감으로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른다. 배신감의 불길에 휩싸여 그녀는 소리친다.
“아버지 때문에 결혼도 포기했는데….”
시간은 모든 것을 간직한 채 역사와 함께 흘러간다. 시간과 더불어 그녀의 기억은 퇴색된다. 그러나 66년 만에 듣는 아버지 소식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얼굴이 뚜렷해진다. 장식장 위의 디지털 탁상시계는 2016년 6월 12일 15시 37분을 알리고 있다. 그녀는 장식장 문을 열고 앨범을 꺼낸다. 앨범을 펼쳐 두 장의 흑백 사진을 들여다본다. 사진 한 장은 동경 긴자거리에서 사각모를 쓰고 검은 망토를 걸친 아버지의 친구와 함께 찍은 동경 유학생 모습이다.
---「아버지 소식」중에서
평양방송에서 김일성이 육성으로 발표했다. 아버지는 귀를 바짝 세우고 들었다. 할아버지는 라디오를 꺼버리고 말했다.
“새빨간 거짓말이야. 빨갱이 놈들!”
할아버지는 분을 못 삭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아버지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행여 사촌 형들이 널 찾아와도 따라나서지 마라. 빨갱이 녀석들, 자식들 때문에 작은집은 풍비박산이 되지 않았느냐? 게네들이 죽었는지, 월북했는지, 서울 어디 숨어 사는지…. 쯧쯧. 우리마저 위험해질 수 있어. 상종 말아라.”
작은할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연년생으로 할아버지보다 6년이나 일찍 결혼하여 아들을 둘 낳았다. 아버지에게는 여섯 살이나 위인 사촌 형들이었다.
“형들이 바라든 세상이 오려나. 그리운 임은 만났을까?”
---「마르크시즘의 꿈과 용서 못 할 부르주아」중에서
혜린은 눈이 빨개지도록 홀짝홀짝 울면서 말했다.
“조선인이라고 차별하는 모멸감은 더 참을 수 없어요. 만철은 위선적이고 야비해요.”
“그래, 내가 보상해줄게요.”
소스케의 부드러운 말투에 혜린은 울음을 멈추었다. 소학교 시절 마지막으로 보고 지금 만났는데도 낯설지 않고 매일 만났던 사람처럼 서로가 무한한 친밀감을 느꼈다.
소스케는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고 24세에 만철에 합격하여 만철 조사부로 발령을 받았다. 소스케는 처음에는 최혜린이 같은 부서에 있는 줄 알지 못했다. 소스케가 사무 일로 주임을 찾아갔을 때 조선인 여직원이 속을 썩인다는 주임의 말을 듣던 중에 최혜린이가 들어온 것이었다.
용원의 경우는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의 수가 증가하였다. 혜린은 직원과 용원 모두 일본인의 임금이 비일본인의 임금의 3배였다는 사실을 주임을 통해서 알았다. 그녀는 소스케의 만류에 못 이기는 척 계속 근무했다. 소스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와 소스케」중에서
차 안에서 소스케가 무료했던지 혜린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꺼냈다.
“피서산장은 말이야, 청나라 전기 황제들이 피서 겸 군사, 정치, 외교 등의 정무를 보고 외교사절단이나 소수민족의 정치, 종교의 수령들을 접견하는 장소이기도 했어. 그래서 승덕은 베이징 다음으로 제2의 정치중심지였지. 승덕에 있는 일본 세관도 규모가 크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자동차가 피서산장 앞에 정차했다. 소스케는 운전기사에게 대기하라고 이러고는 혜린과 차에서 내렸다. 소스케는 피서산장의 전체 배치도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실 정원은 10km에 달하는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마치 만리장성을 보는 듯하네. 자금성의 8배, 이화원의 2배나 되겠어.”
---「중공군과 승덕(와키자시와 은장도)」중에서
“Heaven…. 나는 천국에 있어. 내 심장이 두근거려 말하기 힘들어. 그리고 내가 찾는 행복을 찾아낸 것 같아…. 이번 주 내내 나를 따라다니던 걱정들이 도박꾼의 운 좋은 연승처럼 사라진 것 같아…. 우리가 춤을 추는 동안 천국이에요….”
솜사탕같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의 노래는 혜린의 코끝을 찡하게 했다.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자유롭고 행복한 지상 천국에 있었다. 서로를 쳐다보는 눈빛은 서로를 그리워하고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춤이 끝나자 그들은 정원으로 나왔다. 혜린은 쌀쌀한 날씨에 한기를 느껴 어깨를 움츠렸다. 소스케가 양복 윗도리를 벗어 혜린의 어깨에 걸쳤다. 하늘엔 초승달이 떴다. 어두운 밤을 팔각 등만 희미하게 비췄다. 혜린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어떻게 여길….”
그는 고개를 들고 구름 사이로 아련하게 떠오른 초승달을 쳐다보며 말했다.
“많이 보고 싶었어. 혜린을 찾으려고도 노력했지. 우린 다시 만날 운명인가 봐.”
---「용제의 죽음과 마리의 교통사고」중에서
다음날 벌준 만기가 뇌출혈로 사망했다. 만기의 어머니가 벌을 주어 사고가 났다며 김마리 선생을 고소했다. 그녀와 열대엿 명의 학생들은 파출소로 불려갔다. 면 소재지라 파출소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파출소 순경이라면 동네 아저씨 같아 별반 두려움이 없었겠지만 시 경찰서에서 온 가죽점퍼 차림의 사복형사 앞에는 모두 예외였다. 그녀는 옆방에서 학생들을 위압적으로 조사하는 말소리를 들었다.
“김마리 선생이 만기를 회초리로 때렸제.”
“안 때렸심더.”
학생은 자신 있게 큰소리로 대답했다.
“니 거짓말 하면 너거 아버지 잡아간데이, 미성년자라서 니는 못 잡아가도 니가 거짓말한 책임을 물어 아버지가 잡혀간다 아이가, 똑바로 말해라, 너거 아버지 콩밥 먹으면 좋겠나. 김샘이 때렸제.”
“때렸심더.”
학생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마리」중에서
삼 남매는 소파에 앉아 TV에 집중하고 있다. 월드컵 4강전 축구대회를 응원하는 것보다 더 흥미롭게 TV를 본다. 마리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말한다.
“세계의 이목이 ‘센토사섬’에 집중하겠어요. 전 세계인이 생중계하는 TV에 눈이 꽂혔을 거예요.”
TV 속 아나운서는 중계방송한다.
“하늘에서는 헬기가 순회하고, 바다에서는 군함이 진을 치고, 육지에서는 군인과 경찰이, 센토사섬은 육·해·공군의 철통 경비 아래에 카펠라 호텔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열리고 있습니다. 악의 축이었던 북미의 정상이 만나, 기선제압용 악수로 악명 높은 요동치는 악수가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부드러운 악수를 한 후 말합니다.
‘오늘 매우 중요한 문서에 서명할 것입니다.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김정은은 굉장히 똑똑한 협상가로 오늘 만남이 어떤 예측보다 좋은 만남입니다.’”
화면 속 아나운서는 오전 중계는 여기서 끝을 내고 오후에 다시 중계한다고 보도한다.
---「손잡고 선을 넘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