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생 인류의 요람인 아프리카를 떠난 호모 사피엔스 무리들이 지구 곳곳에 자리잡고 생존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멈추지 않는 이동성, 그리고 다른 개체와의 교류였다. 다양한 형태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무리의 규모는 끝없이 확대되었다. 고립된 개체 혼자가 아니라 배우자, 그리고 자녀가 더하여지면서 ‘우리’라는 단위가 생겨났다. 여기에 생존해 있는 부모, 형제, 자매가 추가되면서 ‘우리’의 규모는 계속 커졌다. 혈연관계에 있는 자들, 가까운 거리에 사는 이웃들이 추가되면서 ‘우리’의 규모는 계속 팽창하였다. 후대의 학자들은 ‘우리’를 무리, 밴드, 트라이브, 혹은 씨족, 부족 등의 명칭으로 불렀다.
‘우리’ 주변에서는 구할 수 없는 진귀한 물건을 얻기 위해, 혹은 사냥감을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만난 ‘남들’은 때로는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때로는 포로로 잡아갔다. ‘우리’ 힘만으로 힘들게 사냥하고 농사짓기보다 저 산 넘어 ‘남들’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아 오면 한동안 편안한 생활이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분지에 자리잡거나 강의 유역에 퍼져 있어서 동일한 생태환경에 처해 있는 집단들 사이의 관계는 급속히 변화하였다. 물물교환, 정보교류, 혼인 등 평화로운 관계가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약탈과 살육, 인간사냥 등 폭력적인 관계도 나타났다. 그러면서 새로운 혼종문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우리’라고 하는 단위는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서 종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확대되었고,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남들’은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 내부의 모두가 평등한 것은 아니었고, 맡은 임무도 다양하였지만 ‘남들’을 상대할 때에는 ‘우리’는 우리였다. ‘남들’이 ‘우리’의 일부가 되고, 때로는 ‘우리’ 일부가 ‘남들’로 변화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호모 사피엔스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체제, 즉 국가를 만들게 되었다. ‘우리’ 국가는 ‘남들’ 국가와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조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경제행위와 종교를 공유하는 더 커다란 단위가 나타났다. 지중해세계, 이슬람세계, 동남아시아세계 등으로 불리는 광역의 단위가 등장한 것이다. ‘우리’ 세계 내부, 혹은 ‘우리’ 세계와 ‘남들’ 세계 사이에서 원거리 교역과 군사 원정이 진행되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한 조직적인 집단학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하던 전염병이 의도치 않게 ‘우리’ 세계와 ‘남들’ 세계를 넘나들며 퍼져나갔다.
기원전 6세기 무렵, 흑해 연안을 무대로 발전하던 스키타이와 이란고원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종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넓은 공간을 하나의 세계로 만들어냈다. 이른바 제국의 등장이다. 기원전 3세기 이후에는 동부 유라시아에서 발흥한 흉노가, 기원후 6세기 이후에는 돌궐이 유라시아 대륙을 무대로 넓은 세계, 즉 제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13세기에 접어들어 몽골인들은 유라시아의 동과 서를 하나로 묶는 대제국을 수립하였다. 메가아시아라고 부름직한 새로운 광역의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몽골의 힘이 쇠퇴한 이후에는 티무르, 무굴, 청과 러시아가 차례로 몽골의 위업에 도전하였지만 미치지 못하였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면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통합한 새로운 세계의 맹주가 되려고 하였으나 패전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1967년에 창립된 아세안은 종족, 언어, 종교와 정치체제에서 다양함을 유지하면서 경제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1991년 12월 소련의 붕괴와 동시에 수립된 독립국가연합(CIS)은 조지아, 우크라이나의 탈퇴를 거쳐 현재는 명맥만 유지되는 수준이다. 이제 아시아는 방위에 따라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시아, 서아시아, 남아시아 등으로 불리고 있다.
복수의 아시아를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경제와 문화 부문에서는 다양한 가능성이 엿보인다. 튀르키예에서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신장위구르자치주로 이어지는 이른바 튀르크벨트는 종족, 문화, 언어, 종교의 공동체이자 과거의 실크로드를 재현한 경제공동체이기도 하다. 중국은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를 국가전략으로 내세웠고, 대한민국은 경제영토(Economic Territory), ‘신북방 신남방’정책을 들고 나왔다. 華商에 대비되는 韓商 네트워크도 이야기되고, 중국의 鄭和에 대비되어 신라인 장보고가 소환되기도 한다. 국경과 민족, 종교를 뛰어넘어 K-Pop, K-Food, K-Culture 등 K자를 붙인 다양한 신용어, 새로운 현상이 출현하고 있다.
과연 정치군사적 측면이 아닌 문화와 경제의 공통성에 기초한 메가아시아의 출현은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면 과거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현재와 미래 사회에 메가아시아의 도래는 어떤 의미를 지닐 것인가? 이 책은 이러한 의문을 품고 있는 연구자들이 모여서 엮은 책이다. 아직 집중적인 논의를 거친 것은 아니며, 의견의 일치를 본 부분도 그리 많지 않다.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연구자들의 문제 제기 정도로 이해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