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많이 가진 엄마보다 등이 넓은 엄마가 되어 주고 싶다. 언젠가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엄마 얼굴을 떠올리면 그리움에 콧등이 시큰해질지언정, 처졌던 어깨가 올라가고, 떨리던 가슴이 고요해지고, 두 다리에 바짝 힘이 들어가도록 해 주는, 그런 등 말이다. --- p.27
우리는 가족의 귀를 ‘늘 열려 있는 귀’라고 마음대로 생각해 버린다. 가족의 귀도 들어 줄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잘 못 한다. 집 밖 사람들에게는 곧잘 하면서 가족들에게는 인색한 말. “지금, 내 얘기 좀 들어줄 수 있어(요)?” 가족이라도 이 정도 ‘최소한의’ 매너는 지켜 줘야 한다. 나부터 오래도록 잊고 살았음을 고백한다. 아니, 생각조차 못 하고 살았다. 이 최소한의 매너를 지킨다면 가족은 누구보다 우리 이야기를 잘 들어 줄 사람들이다. 성가시고 귀찮아서가 아니라 같이 속상해서 한숨 쉬어 줄 사람들이다. 공감의 한숨 말이다. 가족이니까. --- p.49
더듬어 보면, 친구는 ‘어딜 같이 가 주는 사람’ 같다. 어딜 가야 하는데 혼자 가기 심심하거나 민망하거나, 어쨌든 뭣할 때 동행해 주는 사람…. 친구는 그렇게 동행해 주기도 하고, 친구 아니었는데 그렇게 동행하다가 친구가 되기도 한다. ‘동행’이란 말 속에는 ‘시간’과 ‘공간’이 공존한다. 친구들은 같은 시간 속을, 같은 공간 속을 같이 간다. 심지어는 함께하지 못한 시간, 공간에조차 친구는 같이 가 준다. 같이 가기로 한
약속만으로도…. --- p.77
이유를 알 턱 없고, 안다 해도 해결책을 줄 수 없을 게 분명한 꼬마의 한마디에 삽시간에 마음이 고요해졌다. 삽시간에 평온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괜찮아질 거라고 믿어 주는 이가 이 세상에 한 사람은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그 사람이 아직 열 살밖에 안 되고 몸피도 아주 작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싶다. 내가 괜찮아지는 데,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지 싶다. 힘들고 슬플 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실행하지 못할 버거운 행동 지침도 아니고, 귀 언저리만 맴돌다 사그라질 산만한 충고도 아니고, 그저 막연한 이 한마디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괜찮아질 거야.” --- p.109
우린 정말이지, 자신의 감정을 알고, 인정하기보다는 감추기에 더 급급하다. 슬픈데, 울적한데, 속상한데 내색하지 않으려 한다. 자기 안의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면 안 되는 줄로만 안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리 생각해도, 한번 생겨난 감정은 이성의 힘만으로 썰물처럼 말끔히 빠져나가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새어 나온다. 안타깝게도, 자주 꽤 부정적인 방식으로, 고무적이지 못한 내용으로. 별일 아닌 사소한 언행을 구실삼아 자신도 외면하는 어떤 감정을 남에게서 해소하려 들면, 누가 그런 이에게 위로의 선물을 줄 수 있을까? --- p.132
칠십여 평생, 배우가 될 생각은 꿈에서조차 해 본 적 없던 우리 엄마는 지금 단역 배우로 신명 나는 인생을 살고 있다. 당신에게 딱 맞는 일이란다. 너무 좋단다. “수정아, 좋아하는 일을 찾는 데는 75년이 걸릴 수도 있어.” 엄마는 75년 만에 드디어 좋아하는 일을 찾았지만, 지나간 75년을 원망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찾은 게 다행이라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79세를 살고 있다.
--- p.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