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일터는 분열의 세계다. 노동법의 유려한 문구는 대기업 조직 노동자들에게는 그나마 ‘쓸 만한 친구’이지만, 그외 대부분의 다른 노동자들에게는 ‘아득한 꿈’이다. 후자를 부르는 이름마저 가혹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다. 비정규직의 일터는 마치 단테의 지옥도처럼 촘촘하게 엮어올린 사슬이다. 불안정 계약의 씨줄과 하청의 날줄로 짜여진 그곳은 한번 들어서면 빠져나가기가 힘들다. (……)여기에 젠더와 나이 문제가 겹쳐지면 노동세계는 또다시 분열된다. 청년이 일터의 미래라는 언설은 넘치지만, 그 미래를 위한 투자와 협력은 항상 ‘품절’ 상태다. 청년에게 기회는 주지 않으면서, “더욱 노력하라”는 수천 년 묵은 꼰대질은 계속된다. 점점 더 많은 여성이 일터로 나가고 있지만, 차별은 좀체 줄지 않는다.
---p10 「이상헌, 〈푸른 못, 마르지 않는 눈물〉」 중에서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제까지의 성과가 씁쓸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룬 것은 오로지 노동자의 힘 덕분이다. 전태일은 제 몸을 불태우며 노동법을 살려냈고, 1970~1980년대에는 선비의 후배 여공들이 우리를 ‘차별 없는 세상’으로 한 발짝 내딛게 했다. 노동조합을 둘러싼 싸움도 격렬하고, 때론 처절했다.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소리내어 온몸으로 외쳐야 겨우 얻을 것이다. 20세기 노동이 준 교훈이다. 21세기라고 다르지 않다. 노동자는 여전히 싸운다. 덜컥대는 재봉틀이나, 불똥 튀기는 용접기뿐만 아니라, 컨베이어 벨트 같은 매장 계산대에서, 휴대폰에 떠오른 주문을 쫓아 달려가는 오토바이에서, 노동의 싸움은 계속된다. 어설픈 지식인의 말들은 늘 그랬듯 저 배달 오토바이를 뚫고 가는 바람 같은 것이다. 시끌벅적하게 몰려왔다가 이내 뒤로 밀려난다.
---p.14 「이상헌, 〈푸른 못, 마르지 않는 눈물〉」 중에서
오늘도 말해야 한다. 그만두겠다고.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무슨 일을 하시나요. 새를 쫓습니다. 아니, 그보다 아무런 성취도, 보람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런 걸 느껴야 돼? 그렇다고 급여를 포기한다고?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자꾸 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p.21 「민병훈, 〈그들이 하지 않은 일들〉」 중에서
대추나무 묘목을 심은 화분을 침대 발치에 두고 아침마다 물을 줬다. (……) 매일, 아주 조금씩, 몇 센티씩 자라는 식물의 하루가 모여서, 열매를 따고, 다시 내년을 위해 씨앗을 땅에 묻는 일련의 과정에서, 지난날에는 느끼지 못한 무언가를 감각하고 있었다.
---p.51 「민병훈, 〈그들이 하지 않은 일들〉」 중에서
그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다. 그 현실의 전제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치명적인 결점은 있지만 아무튼, 인간 차봉필은 중졸 학력으로 자동차공장 사환부터 시작해 지금의 BP산업까지 일구어낸 산업역군이었다. 그동안 겪어온 숱한 위기에 비하면 이게 무슨 대수겠는가.
---p.61 「천현우, 〈임자〉」 중에서
인생 대부분을 바친 일터에 미래가 없다고 말할 때 당사자는 어떤 심정일까, 임죽림은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차봉필이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측정할 수 없었다. (……) “나 때는 말이야. 중졸도 성실하게 일하면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애도 낳았어. 기술 하나만 있어도 대졸자들보다 돈도 잘 벌었지. 나 일 잘한다고 김우중 회장님한테 표장도 받았어. 그땐 진짜 회사 다니는 게 즐거웠거든. 요즘 애들이 이렇게 살 수 있겠어? 아니겠지. 우리나라보다 인건비 싼 곳 널렸고, 배운 기술 좀 써먹을라고 하면 새 기계가 튀어나와. 손재주로 먹고사는 시대는 우리 대에서 끝난 거 같아.”이젠 우직하게 한 기술만으로 먹고살 수 없는 시대가 됐다. 그래서 아들 차용진이 자기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오로지 공부, 오로지 좋은 대학만 보고 달리도록 했다. 이 방법이 정답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딸 차혜원은 좋은 대학을 나왔지만 사실상 백수 신세. 기술도 공부도 오답이었다. 그렇다면 내 자식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pp.77-78 「천현우, 〈임자〉」 중에서
여자는 출처 모를 불쾌함을 느끼며 봉투를 뜯는다. 커다란 책자 두 권이 들어 있다. 여자는 여전히 불쾌한 채로, 아니 조금 더 불쾌해져서 책자를 꺼낸다. 검정색 표지에 조악한 글자체로 ‘세계의 끝이니 새로 시작할 때다’라고 적혀 있다. 이제 대단히 불쾌해진 여자가 두 권 중 한 권을 아무렇게나 펼쳐본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붉은색 굴림체로 인쇄된 글자들이 여자의 눈을 어지럽힌다.
---pp.91-92 「한유주, 〈커뮤니티〉」 중에서
오후의 햇빛이 아파트 유리창들을 난사하듯 비추고, 교차로에서 차들이 멈췄다 서행하고, 지난 지방선거에서 낙선한 이의 현수막이 어찌 된 일인지 아직까지 무력하게 걸려 있다. 여자의 목덜미에서 땀이 흐르고, 이미 흘러내린 땀들, 바람 한 점 없는 삼복더위에 손부채를 부치며 지나가는 사람들, 횡단보도 앞에 선 여자가 좀처럼 바뀌지 않는 보행자 신호를 기다리며 조바심을 낸다. 누구지,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여자는 자신이 표적이 된 것일까봐 두렵다.
---pp.93-94 「한유주, 〈커뮤니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