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노인, 부랑아가 되어 보라고?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고, 사랑해야 한다고요? 다 허울 좋은 말일뿐이에요! 지금 이 시대에는 백수보다 더 하위 계층은 없어요. 게다가 비루하고 하찮은 존재를 사랑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말입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왜 늦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묻지 않았다.
“부탁하건데, 나와 만나는 이 시간만이라도 이제까지 규정되었던 당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해보세요. 당신은 백수이기를 거부하고 두려워하지만 그 강한 거부와 두려움은 역설적으로 존재를 더 단단하게 규정하는 틀 때문입니다. 단 한순간도 백수라는 단어를 잊은 채 자신을 생각할 수 없는 당신은 지금 불안 속에 둥지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 당신도 사랑의 힘이 당신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것으로도 변용할 수 없는 억압되고 억제된 상황이 불안을 발생시키지요.”
---「1장. 대한민국 20대 백수의 불안: 불안증」
“스피노자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과장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곤 하는데요, 특히 남자들이 많이 그러더군요. 자신을 대단한 사람,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로 생각하는 소위 ‘자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크게 보고, 자신에게 전지전능한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과시하는 이런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하는 건가요?”
스피노자는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앉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도 흥미로운 주제를 던져주시는군요. 자신의 역능은 내재성에 의해서만 구성됩니다. 이 내재성은 삶을 구성하는 영토이며,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관계망입니다. 그러나 과대망상은 삶의 지평을 벗어난 초월적인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면서 생깁니다. 자신의 내재적 역능을 벗어난 계획이나 실행 능력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6장. 열등감과 패배감이 어긋날 때: 과대망상증」
“사람들은 왜 욕망의 노예가 되는 걸까요? 어째서 멀쩡한 사람이 물질에 대한 탐욕을 느끼며, 성욕을 이기지 못해 변태가 되는 거죠? 오늘 저는 인간이라는 게 부끄러울 만큼 비루한 욕망의 단면을 보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욕망이라는 게 무엇이길래 사람을 그토록 비참한 지경까지 끌고 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비통한 탄식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한 차례 화통하게 웃어재끼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 철수 씨는 욕망을 왜 그토록 부정적으로만 보십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에게 욕망이 없으면 뻣뻣한 시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를 원하고,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고, 춤추기를 원하고, 색다른 무언가를 창조해내기를 원하는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욕망’입니다. 욕망이 있기에 사람에게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고 인간적인 매력이 생긴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7장. 당신 안의 욕망을 긍정하세요: 도착증」
“조울증이라… 난생 처음 듣는 병명입니다만 기쁨과 슬픔을 오락가락한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군요. 일단 정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감정, 정동, 정서는 같은 얘기지만 약간의 개념적인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기쁨, 슬픔과 같은 수동적인 정서만을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슬픔은 수동적인 작용 중에서도 수동적인 것으로, 기쁨은 수동적인 작용 중에서도 능동적인 것으로 구분됩니다. 자, 만약 어떤 사람이 기쁨의 정서를 갖고 있다면 자신의 욕망이 긍정되고 증가하는 경우겠지요. 반대로 어떤 사람이 슬픔의 정서를 갖게 된다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예속되거나 무능력함으로 인해 욕망이 좌절 또는 감소하는 경우겠지요.”
단순한 기쁨과 슬픔에 대한 설명으로는 조증 상황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서라는 면에서 기쁨과 슬픔에 대한 개념은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울증 경우와 같이 기쁨과 슬픔을 오락가락하는 경우에 대한 해답은 아닌 것 같네요. 조증의 경우에는 욕망이 채워진 것은 아니지만 과도하게 기뻐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스피노자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의 지적에 공감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는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