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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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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3월 16일
쪽수, 무게, 크기 143쪽 | 208g | 124*194*20mm
ISBN13 9791192986012
ISBN10 1192986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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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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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막힐 때는 낙타를 업고서 사막을 건넌다고 상상하지. 검푸른 하늘에 박힌 뭇별들을 거룩한 안내자 삼아 닷새째 나가고 있으나, 말문이 트이기 전까진 낙타를 내려놓지 않으리라 다짐하지. 꼬박 낙타를 떠메고서 사구를 넘자니 발목이 모래 무덤에 빠지고, 위안을 구실로 단조로운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지만, 업힌 낙타는 마치 몹쓸 병이라도 도진 것처럼 생기를 잃고 혼곤한 잠에 빠져 있어. 그러니 어서 마을로 낙타를 데려가야 해! 걸음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가 그래서라 상상을 서두르지. 아무리 병든 낙타라지만 순한 새끼 양보다 가벼울 리 있을까. 대관절 낙타를 업는 게 말이 되냐며 누구든 나서서 뜯어말릴 만도 한데 아직 그러는 이는 없어. 온종일 걸어도 낙타가 무겁게 침묵하는 까닭과 일평생 떠맡아 온 등짐이 얼마나 끔찍했을까 겪어보지 않고서야 어찌 알겠어. 끈질기게 재칼의 무리가 따라붙으려 하지만, 그래도 사막을 가로지르다 보면 언젠가는 낙타의 마을에 닿으리라 터벅터벅 행로를 고집하지. 행여 지치려고 해도 그의 마을에서 새겨지게 될 문장은 무얼까, 기대와 궁금증이 혼미해지는 상상을 가까스로 부축해 세우지. 그런데 알아? 누구든지 한 번쯤은 낙타의 문장을 얻겠노라 먼 길을 헤치는 상상이야 하겠지만 낙타라는 존재는 워낙 낯가림이 심해서 어설프게 다가가 등을 내밀었다간 아찔한 곤욕을 치른다는 걸.
---「낙타의 문장」중에서

알맞은 어느 저녁 당신께서 찾아오셨다. 손때 묻은 지팡이를 문가에 세우더니 나직이 저녁 한 끼를 청하셨다. 어디서 그런 겸양한 음성을 듣겠는가. 갑작스런 당신의 현현(顯現)에 식구들 모두가 크게 놀랐다. 그럼에도 아비가 침착히 나서 당신을 식탁으로 안내했다. 때마침 부엌의 화덕에서는 스튜 냄비가 괄게 끓어올랐고, 당신께서 막 앉자마자 실내의 등불이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불빛이 어룽대는 식구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다보시곤 제일 수줍어하는 아이를 가리키며 나이와 이름을 물으셨다. 그러곤 붉게 달아오른 막내의 뺨을 어르며 가정의 화목을 축원하셨다. 허름한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은 기름지지 않아도 저마다 정갈했으며 질그릇 부딪는 소리가 이따금 창밖을 떠도는 바람소리와 어울렸다. 어느덧 식사가 끝나갈 즈음 아비가 무거운 입을 열어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며 당신의 행로를 물었다. 당신께서는 갈릴리 호수 너머의 나사렛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 마을에서 그곳까지는 얼마나 먼가. 더군다나 어두컴컴하게 밤이 깊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당신께서는 우리의 만류를 뿌리치셨다. 이윽고 숙연한 저녁기도를 마치고는 지팡이를 찾아 짚으셨다. 당신의 그윽한 눈동자 속에 애타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내비쳤다. 아쉽게도 만남은 길지 않은 시간, 언제가 될지 훗날의 재회를 기약하기도 어려웠다. 컴컴한 바깥으로 향하는 당신께서는 아무것도 신지 않은 차가운 맨발이었다.
---「저녁의 신」중에서

묻건대 못 만드는 걸까 안 만드는 걸까
전자라면 초일류반도체 생산국이란 지위가 어색하고
후자일 경우 소비자의 호된 질타를 받아도 싸다
그깟 필기감이 물 흐르듯 부드럽고 우아하며
찌꺼기가 번져 종잇장이 얼룩진다거나
놔두고 방치한들 잉크가 말라 굳지 않는 펜 하나쯤
업계의 선구인 귀사가 여직 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애석함을 넘어 의문스러울 따름인데
가뜩이나 혐한 기류가 수그러들 줄 모르는 시국에
이 글을 꼬투리 잡아 교활한 일본 우익이
한바탕 난리 칠 게 불 보듯 빤하긴 해도
사십 년 가까이 모나미펜으로 생업을 이어온 필자가
언젠가 딸아이가 건넨 미쓰비시 펜 자루에 혹해
어쩌면 이토록 글씨의 터치가 매끄러울까
놀람과 부러움을 감추기 어려웠어도
그렇다고 내세우듯 셔츠 주머니에 꽂고 다닐 수 있겠는가
아무리 좋기로 어찌 일제를 구매한단 말인가
뼈저린 치욕의 역사가 분하지도 않으며
반성은커녕 한마디 사과에도 인색한 저들의 작태가
천불이 일도록 괘씸하지 않더냐! 호통 대신
요걸 며칠만 빌려다오, 딸애에게 속닥거린 말을
이제 와 쓸어 담을 수 없음을 책망하며
볼펜 한 자루로 저들과 우열을 겨루자는 심사겠냐만
힘으로 응대하려 든다면 힘으로 대응할밖에
분발을 독려하는 뜻에서 몇 글자 적느니
밝히나 마나 이 초고는 모나미153 시리즈로 썼다.
---「모나미에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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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후배, 젊은 시인이라고만 생각했던 이학성도 이제 만만치 않은 나이구나. 세월의 속절없음에 새삼 움찔하며 20년도 훨씬 전 그를 떠올리는데, 우직할 정도로 순정한 눈빛과 목소리가 여전함을 시집에서 확인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람이라고는 자기 하나밖에 없는 태초의 아담 같은 외로움을 안고, 시인의 고독과 자부심으로 세상의 바스락거림, 사물의 속사정을 엿듣는 이학성. 그의 바스락거림을 엿보는 시간. 딸들 손끝에는 물방울 하나 묻히지 못하게 하면서, 결벽증에 가깝게 깔끔하니 살림을 전담하는 아버지 시인의 모습에 짠하기도 하다가, 가령 CCR을 틀어놓고 ‘혼술하는’ 시인의 취흥 도도한 망상 등에는 절로 미소가 절로 떠오르고, 고샅고샅 박혀 있는 유머에 낄낄 웃었다.
-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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