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와 유리, 화장품과 도자기를 만들고 청동 제품을 만들거나 금이나 금과 유사한 물건을 제작하는 경험적 기술을 지닌 장인들에게 이론은 그리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 사상가들은 (지금의 우리가 화학적 변화라고 말하는) 이러한 형태의 변화가 어떤 이유와 방법으로 가능한지 알기를 갈망했다. 왜 금속이나 유리는 색깔 있는 광물과 함께 녹았을 때 모습이 바뀌었을까? 갈레나(불순한 산화 납)를 가열할 때 은 구슬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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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 동안 역사학자들은 연금술이 사이비 과학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추적해왔다. 연금술과 화학의 경계를 짓는 작업은 1740년대 이후 수학 및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종합 연구기관이자 학술원인 아카데미데시앙스에서 프랑스 화학자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연금술은 금을 만드는 행위로 범위가 한정되었고 (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오히려 그 이상의 활약이 있었다) 연금술사를 탐욕에 찬 사기꾼으로 치부함으로써 이 구분 작업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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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켈수스가 자신만의 의학과 화학의 혁신을 이룬 것은 바로 이런 심오한 종교적 맥락에 근거한다. 아마도 의사로서의 그의 명성은 자연이 스스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 그의 보수적 성향과 자연의 섭리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인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가 치료 약물의 목록에 화학 약품을 최소한으로 처방한 것도 이런 태도 때문이다. 그는 연금술을 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어 보이는 물질로부터 실체를 꺼냄으로써 유용한 물질로 분리하는 방법으로 여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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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혁명은 단지 개념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도움이 되었는데, 정확한 저울과 유리 기구, 그리고 유디오미터(공기 순도 측정기) 등을 사용해 기체를 만들거나 중량을 재고 가늠할 수 있는 실질적 능력을 포괄했다. 원소들과 물질 구성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관점을 바꾸고 화학자들이 서로 소통하는 방식을 재정비한 화학자는 프랑스 공무원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 1743-94)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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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에서 화학 기호를 능숙하게 다루는 일은 당시 대학에서 수십 년 동안 구두시험을 치르다 필기시험을 도입한 것만큼이나 중대한 사안이었다. 독일의 역사학자 우르줄라 클라인(Ursula Klein)이 보여주었듯이, 1830년대에는 유기 화합물을 구분하고 식별하고 분류하는 새로운 방법들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으뜸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일련의 새로운 유도체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베르셀리우스의 화학식을 논문에 활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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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대에 이르자, 게르하르트는 그가 형의설(型-說, type theory)이라고 명명한 유기 화합물의 새롭고 광범위한 분류법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그는 로랑이 제안한 분자의 단일 개념과 스승인 뒤마의 선행연구에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그것은 라디칼 물질과 다른 원소의 다중 치환이 가능하다는 것이었고 모든 유기 분자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몇 가지의 무기물 기본형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고 제안했다. 그러니까 유기물 분자는 단순히 무기물 분자의 치환 유도체라는 것이었다. 그 무기물 유형들은 수소(H2), 염화수소(HCl), 물(H2O)이었고 이후에 암모니아(NH3)를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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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사의 ‘거인들’이 등장한 19세기 전반에 걸쳤던 화학 발전에 윌리엄슨의 중추적인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물의 형(type)이 가진 능력이 ‘원자가’와 ‘구조’의 개념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에테르화에 대한 명확한 연구 역시 각각의 원자들이 중간 화합물을 거치며 각 반응 단계에서 위치를 바꾼다는 것을 보여주어 이후 화학자들이 화학적 변화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연구할 수 있는지 제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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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물리화학의 부상은 실험실 설계에 보다 큰 변화를 가져왔다. 자외선과 적외선 분광기, 분광 광도계, X선 카메라, 질량 분석기, 크로마토그래피 같은 실험 기구와 기술들은 물질을 분석하고 그 구조를 바로 알려주는 새롭고 더욱 간단하며 빠른 방법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물리적 측정 방법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약품과 가열로 인한) 습식 및 건식 분석 방법을 완전히 대체했다. 결국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리비히와 콜베 시대의 전통적인 실험실 작업대에서 볼 수 있었던 각종 시약을 얹는 선반의 비계가 제거되며 일반적인 책상 모습으로 돌아갔다.
--- p.181
1914년에 발발한 전쟁은 독가스를 사용한 전투라는 이유로 세상에는 ‘화학자들의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화학전이 직접적 원인이 된 전쟁 사상자는 1퍼센트가 채 안 된다. 그럼에도 이 문구는 대영제국을 전시체제로 전환하는 데에 화학이 이용된 방식을 묘사하기 위해 1917년에 처음 사용되었다. 비슷한 경우로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제2차세계대전은 원자폭탄 제조에 쏟은 노력을 이유로 ‘물리학자들의 전쟁’이라 불려왔다. 사실, 여기에도 화학자들은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와 중수 제조에 깊이 관여했다. 화학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폭탄도 없었을 것이다.
--- pp.21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