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혐오의 대상으로 느끼는 것은 어떤 집단이나 그것이 길러낸 어떤 사람의 인지 때문이다. 그런데 혐오의 원인과 대상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불일치가 생길 때 혐오는 그것이 닿으려는 대상이나 위치를 바꾼다. 즉 다른 대상, 다른 위치로 옮겨가는 차이와 전위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혐오는 다른 감정들과 함께 짝을 지어 다니며 ‘물건값’처럼 가치를 가지게 되고 사회적인 효과를 수행한다. 혐오의 감정정치에서 발생하는 ‘혐오값’은 ‘정치값’에 해당한다. 흥미롭게도, 감정의 정치경제에서 혐오는 유통될수록 더 많은 잉여가치, 더 많은 부수 효과를 낳는다.
---「1장 포스트트루스와 혐오정치, 26쪽」중에서
혐오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오랜 문화적 전승 속에서 사람들에게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혐오 감정, 혹은 혐오가 사회적으로 투사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종의 이중성 때문이다. 분명 혐오는 건강한 상식을 가진 시민이 공동체적 삶에서 극도로 경계해야 하는 현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더러운 환경에 대한 혐오나 폭력에 대한 혐오처럼 특정 상황에서는 순기능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혐오 감정의 생래적 특성은 혐오 자체를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보이게 한다. 그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그런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압하는 규제야말로 억압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혐오 개념의 모호함은 문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실제로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혐오 개념은 증오(hate)를 가리킬 때가 적지 않다. 그러나 혐오와 증오는 그 행동 양식에서 구별된다. 혐오는 대개 자신이 싫어하는 벌레나 비위생적인 환경에 대한 대응처럼 기피하고 멀리하는 행위를 가리키지만 증오는 해당 대상에 대해 노골적으로 공격적인 의사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혐오는 도덕적 순기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할 여지가 있지만, 증오가 도덕적인 순기능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우리는 두 감정 상태를 동일시하곤 한다.
---「3장 혐오의 이중성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 81~81쪽」중에서
편견을 이용하는 선전선동의 목적은 심리학적-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정치적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현실적 이득을 위해 선전선동은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증오를 동원하고 이를 위해 허구적인 이유를 양산한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올바른 대항은 “진정한 비이데올로기적 진실을 가지고 이성의 관통력”(Adorno, 2019: 55)을 통해, 즉 지성주의적인 방법으로 가능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편견에 휩싸여 선동에 현혹되는 사람들을 일종의 “교화 불가능자”(Adorno, 2019: 16)로 치부하는 태도를 지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60년대 독일에서 신극우주의에 빠져든 사람들은 1945년의 패전으로 사회경제적 붕괴를 집단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에게는 독일이 다시 올라서야 한다는 강력한 감정이 깃들게 되었다(Adorno, 2019: 16). 여기서 우리는 편견과 선전선동의 내용 그 자체에 대한 연구도 중요하지만, 편견에 휩싸여 선전선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집단적 경험’을 했고 그에 따라 어떠한 감정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 감정 중 어떤 부분이 편견 및 선전선동과 상호 연관되었는지 등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확인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8장 혐오와 비판이론, 216~217쪽」중에서
혐오는 분노와 명확하게 구분된다. 분노는 회피(aversion) 동기가 아니라 접근(approach) 동기와 연관된 감정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는 것은 그 대상에게 행동의 교정을 요구하는 무의식의 발로다. 즉, 화를 냄으로써 자신이 불쾌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그 메시지를 상대방이 받아들여 앞으로는 분노를 자극하는 행동을 하지 않기를 기대하는 경우에 작동하는 감정이다. 반면 혐오는 상대방에게서 개선의 여지를 바라지 않는 감정이다. 상대방이 보여주는 이질성 때문에, 피하고, 배척하고, 소외시키고자 하는 행동이 혐오감에서 비롯된 결과다. 그리고 어떤 대상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 대상을 자신과 동등한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절멸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9장 혐오와 비인간화, 235~236쪽」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