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변화가 정상이고 오히려 변치 않는 것이 이상한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제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해야만 하고, 변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전락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시대로부터 온 것이라면, 늘 공황 상태에서 파랗게 질려 있을 시대…… 그러나 이제 공황은 일상이 되었고, 이러한 일상에서 공황 상태에 빠지는 사람은 병자로 전락한다. 이 모든 것은 세상에 ‘디지털 기술’이라는 것이 출현하면서 시작되었다. ---p.7, 「머리말」
· 디지털 컨버전스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 것인지는 다만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미래 예측은 늘 양가적인 것이어서, 디지털 컨버전스가 초래할 존재의 의미 변화에 대한 가치 평가가 분명하게 내려질 수는 없다. 그러나 철학은 인간의 실존적 삶의 수호자이다. 따라서 디지털 컨버전스의 미래에 대한 즉각적인 가치 평가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이 결코 무책임한 태도로 귀결될 수는 없다. 그것의 미래가 혹여 인간의 실존적 삶을 파괴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철학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결정된다. 철학은 그러한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디지털 컨버전스가 초래할 변화들의 양상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예견해야 한다. ---p.23, 「프롤로그」
· 디지털 기술에 의해 묘사되는 세계는 하나의 기만적 세계를 열어놓을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러한 기만 속에서 인간은 채워지지 않은 근원적인 욕망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연결된 네트워크 사회에서 부유하는 자기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며, 비트로 환원되어 무차별적 존재가 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욕망, 즉 차이에 대한 갈증이다. 이러한 실존적/존재론적 욕망은 디지털화하는 세계에 대한 저항으로 표출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은 존재의 총체적 디지털화에 대한 반대 극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p.66, 「총체적 디지털화와 부유하는 주체」
· 가상과 현실의 디지털 컨버전스는 가상-현실 연속체로서의 혼합현실을 추동시킴으로써 가상과 현실을 통일시킨다. 이 통일은 가상이 현실과 괴리된 것이 아니라 그 또한 현실이라는 점을 제시한다. 이 둘이 이질적인 이상 가상과 현실은 연속이 아닌 병립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 이원론적 전통과는 달리 가상과 현실이 이질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이 둘을 인식론적으로도 존재론적으로도 굳이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가상과 현실의 통일 속에서 현실을 가상으로 환원하거나 가상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 ‘나’의 존재 터로서 ‘살아 있는 현실(lived reality)’일 따름인 것이다. 신화는 우리 본래의 삶이 참여와 몰입을 통해 상상과 현실을 넘나들어왔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현재 우리의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기술로서의 혼합현실이 갖는 근본적인 의미인 것이다. ---p.149, 「혼합현실에 대한 철학적 반성」
· 상상력은 그저 주어진 것들을 이리저리 짜 맞추는 레고 놀이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실증적(positive) 상상력일 뿐이다. 상상력의 한 기능은 주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반응하는 것, 혹은 주어진 것을 거부해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 지성의 부정할 수 있는 능력(negativity)에 의지해 있다. 디지털 시대의 상상력을 위한 인문학의 기여는 그런 점에서 주어진 대상들에 이야기를 불어 넣어 생기를 돋아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지배하는 거대한 기술에 대해 저항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p.312, 「융합 미디어 시대의 상상력」
· 트랜스휴머니즘과 네오휴머니즘 사이에서 차별화되는 다양한 스펙트럼은 결국 디지털 형이상학의 압력에 따른 획일화와 그에 저항하는 차이 사이에서 역동적인 균형점들을 찾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예컨대 디지털 컨버전스 기술이 시간과 거리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줌으로써 어떤 이에게는 자연적 시간과 거리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느림’으로 여겨지는 반면, 지나치게 빠른 속도에 멀미를 느끼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자연적 시간과 거리를 더욱 선호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속도를 강조하는 문화?‘속성(速成)의 공학’?와 자연적인 시간과 공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문화?‘숙성(熟成)의 미학’?가 함께 공존하면서 다양한 혼종 형태가 등장할 것이다.
---p.353, 「미래 철학의 사상적 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