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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 묶어둔 시간

현대시학 시인선-114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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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3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36쪽 | 192g | 125*188*20mm
ISBN13 9791192079578
ISBN10 1192079574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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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가 꽃잎을 터트렸다
마침표를 찍지 못한 봄이 동구릉을
서성이는 11월

아니 꽃이 미쳤나 입동이 지났는데
철딱서니 없기는
누군가 툭 던지고 지나간다

노랑이라고 다 같은 노랑이 아니다
숨비소리처럼 터지는 꽃
봄날에 피었던 그 꽃이 아니다

병아리들 봄나들이 마치고
다시 또 한번 가보지 못한 낯선 길에서
봄을 노래하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비록 철을 놓치고 길을 잃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자신의 향기를 찾아가는
그래 지금이 절정이다

가을을 서성이는 나도 그렇다

---「지금이 절정이다」중에서

저녁 산책길에 떨고 있는 감국 몇 송이 꺾어다
화병에 꽂아주었다

꽃은 또 왜 꺾어왔냐
그것들도 순리대로 살다 가는 거여

엄마처럼 멀리 보지 못하고
꽃잎에 맺힌 시간 조금만 더 붙잡고 싶었다
무릎이 꺾인 허공에서
시나브로 목을 축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닷새째 결국 숨을 놓았다

내가 믿었던 사랑이 다 옳은 건 아니다
향기가 바스라진
그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그에게 나는 사랑이었을까 아픔이었을까
매듭을 찾지 못한 약속 하나

꽃잎의 시간은 이렇게 아슬하다

---「꽃으로 묶어둔 시간」중에서

왕숙천 둔치에서 겨울 냉이 한 줌 캐왔다
추위에 움츠러든 잎 대신
더 길어진 뿌리의 맛과 향이 진하다

언 땅 밑에서 길을 찾던 캄캄했던 시간들이
이렇게 깊어졌을 것이다

하루에 세 번씩 들어오는 마이크로버스는
도시 바람을 실어 나르고
그녀들의 냉이 바구니도 봄바람을 타고
하나 둘 고향을 떠나왔다

볕뉘 한 조각 없는 객지에서 할 수 있는 건
몸을 낮추고 자리 잡는 일
방직공장 산업체 학교를 다니면서도
빛을 찾는 뿌리의 시간이었다

친구야 나도 냉이를 한 바구니나 캐왔다
봄 냉이도 울고 갈 맛이네

3년째 코로나로 식당도 어려운데
서산에서 날아온 그녀의 목소리는 통통하다
자신이 겨울 냉이라는 걸 저만 모른 채

오늘의 특별 메뉴는 봄
손님들도 파릇파릇 싱싱해지겠다

---「뿌리의 시간」중에서

휴일도 없이 전화가 울린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있는 동굴 속에서
시든 향기 지우는 유품정리사
감정을 읽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반쯤 남은 소주병과
탈출을 포기한 이력서 뭉치와
식 후 30분 복용을 지키지 못한 약봉지들의
눅눅한 절망도 털어낸다
몇 가닥 말라붙은 컵라면 면발처럼
방안은 체념으로 익숙한데
달력은 삼복 더위에도 목련이 벙글고 있다
금방이라도 달려가려는 듯
문 앞에는 신발 한 켤레 단정하다
어디로 걸어가고 싶었을까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한 장의 가족사진
규칙을 어기고
아득할 때도 있지만 거기까지다
한 점 의혹도 없이

오늘도 섬 하나 먼 바다로 떠나보냈다

---「마지막 이사」중에서

옷 한 벌 짓기 위해 놓지 못한 바늘
오롯이 집중하며 마음을 담아도
위를 꿰매면 아래가 터지고 아래를 꿰매면 위가 울고
어긋나고 틀어지고 손가락도 찔렸어

나를 춤추게 할 가볍고 명랑한 옷이라면
천의무봉이 아니라도 괜찮다

결이 다른 소재도 채집해야겠어
누군가는 연어와 돌멩이와 밥을 노래한다는데
나는 잠자리 날개옷 입고
그 천진한 눈망울로 세상을 읽을 거야

재봉틀로 촤르르 길을 내는 전문가도 많은데 쯧쯧쯧
바람이 혼잣말을 던지고 떠난 오후
바늘귀에 마음 한 가닥을 다시 꿰었어
아직 찾지 못한 문장은 어디에 있을까

바늘 끝 한 조각 햇살처럼
엉켜있는 실타래 풀어주고 다듬어 가야 하는
내 생의 시린 옷 한 벌
---「시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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