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목과 복부에서 시커먼 피가 울컥 솟구치는 와중에도 남자는 눈을 시퍼렇게 부릅뜨고 실낱같은 생명줄을 악착같이 부여잡고 있었다. 헉! 순간 허공에서 시선이 맞닿았다. 본디 얼굴색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선혈에 얼룩진 남자의 새카만 눈동자가 무감하게 건너와 해수를 훑었다.
--- p.8
실수에 관대하다는 말에는 동의하는 바였으나 경계가 심했다. 그는 제 몸에 상처를 낸 날붙이보다 주사가 더 위험한 도구인 양 굴고 있었다.
--- p.23
“익숙해지는 게 좋을 겁니다. 앞으로 계속 봐야 할 테니까.”
당연한 말이었다. 자신은 주치의였고, 매일같이 환부를 들여다보는 사람이니. 하지만 남자의 말은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는 듯했다.
--- p.114
“주치의 당장 바꿔! 원 재수가 없으려니.”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기분이 든다.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속내를 삼켜낸 지석이 해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채두식의 역정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회장님, 제가 부탁했습니다. 제가 선택한 주치의입니다.”
--- p.137
“매주 병원에 내원하셔야 합니다.”
“와인은 어떻습니까. 아, 술이 별로면 커피도 좋고. 커피가 싫으면 차도 좋고. 당신이 좋아하는 거면 뭐든.”
“내일 오전에 수간호사님이 퇴원 절차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드릴 겁니다.”
--- p.169
말이 되지 못한 마음은 곧 한숨이 되어 삼켜졌다. 그가 보고 싶었다. 단 하루의 여유도 없이. 남자의 존재는 각인처럼 남아 해수를 불면의 바다에 밀어 넣었다. 하지만 생각에 불과한 것들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실체가 된 말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자신이 짊어져야 했다.
--- pp.270~271
“앞으로 3년간, 채지석의 아내로서 맡은 바 의무를 다할 것이며.”
잘 듣고 있나 확인하듯이 남자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냉랭한 시선을 마주하자 뜨거운 불덩어리가 왈칵, 목구멍으로 치받쳤다. 뭐든 대꾸하고 싶은데, 어째서인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지금으로선 침묵을 지키는 게 최선이었다.
--- p.316
“내 눈빛이…… 어때서.”
휩쓸리면 안 돼.
수평을 유지하던 세상이 기울어지는 걸 막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지만, 문득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거란 불길함이 해수의 뇌리를 덮쳐왔다.
“달아.”
--- pp.459~460
2권
“미치도록 미운데…… 미워할 수가 없어서, 아니 그 사람을 미워하고 싶지가 않아서……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소름 끼치게 경멸스러워.”
다만 그를 향한 마음이 자신의 의지를 녹여버리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버텨온 것이었다. 쌓이고 침식하고 다시 퇴적된 감정이 너무도 깊었다.
“하지만 미워하는 마음마저도 애증이라고 부르는 거라면…… 그래, 네 말이 맞아. 나 그 사람 좋아해.”
--- p.23
“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내가 다 할게. 좋아한다는 말도, 보고 싶었다는 말도 두 번이든, 백 번이든 내가 다 할 테니까.”
뭉개지듯 닿은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인 채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해수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감았고, 지석은 마구잡이로 일렁이는 충동을 누르며 숨을 골랐다.
“아무 데도 가지 마. 가만히 있어, 그냥 그 자리에.”
--- p.65
“여기가 너무 아파. 병명 같은 건 몰라. 그냥 지석 씨가 원인이야. 원인은 도려내야 마땅한데, 그러기 싫어요.”
--- p.71
맞닿은 입술 사이로 여러 가지 색의 감정들이 뒤엉켰다. 사랑, 행복, 기쁨, 환희 따위의 것들.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엔 이미 너무도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01
망설임에 잠시 머뭇거리던 해수가 이내 웃으며 남자의 목울대를, 정확히는 그곳에 남은 흉터를 매만졌다. 조금 더 예쁘게 봉합했어야 했는데. 손끝에 닿은 아릿한 기분에 해수는 작게 숨을 삼켰다.
--- p.140
미쳐가는 게 분명했지만 상관없었다. 미치도록 좋았으니까. 하지만 이 중요한 시기에 통제력을 상실해선 곤란했다.
--- p.185
허공에서 시선이 복잡하게 엉켰다.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되뇌며 다독이는 마음과는 달리, 이성을 잃고 그에게 달려가 안겨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 p.240
입 안으로 비릿한 맛이 번졌다. 다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다 버리고 너에게 가겠다고. 머릿속에 새겨진 듯 죽어도 망각할 수 없는 기억이라면 칼날로 도려내버리면 그만이다.
--- p.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