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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개미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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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3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500쪽 | 518g | 128*188*30mm
ISBN13 9791192579535
ISBN10 1192579534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친구 집에는 항상 나이 든 할머니와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스에오는 친구 집에서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노파는 여름에는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민소매 속옷에 주름치마를 입고 다 해져 거스러미가 일어난 다다미 위에 갓 찧어 온 떡처럼 철퍼덕 앉아 있었다. 듬성듬성 남은 머리카락을 정수리에 동그랗게 묶어놓았는데, 숱이 워낙 적어 체리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축 처진 유방이 속옷 틈새로 훤히 들여다보였다. 골짜기 바닥에 있는 그 집에는 햇볕이 거의 들지 않았다. 노파는 간신히 비쳐 드는 빛을 역광으로 받으며 스에오를 향해 고개를 든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자그마한 귀신 같기도 하고 섬뜩한 생물 같기도 한 그 모습은 아무튼 이 세상 것이 아닌 존재처럼 느껴졌다. 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동생은 말 한마디 없이 오빠를 따라다녔다. 스에오 눈에는 사람이라기보다 작은 동물처럼 보였다.
---p.10~11

가난과 빈곤은 다르다. 가난은 돈이 없는 것뿐이다. 하지만 빈곤이란 인프라가 없는 땅과 같다. 말도 조리 있게 하지 못하는, 계산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사를 존중받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상상력이 성장하지 않아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상밖에 보지 못한다. 서로를 존중하는 행위는 상상력을 가진 사람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상상력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자연스레 인식하니까. 타인을 존중하는 풍조가 없는 공동체 안에서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시당하느냐, 무시하느냐’ 둘 중 하나다. 아니면 ‘내게 이득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런 기준 안에서 아이는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성가신 존재다. 아이는 괴롭힘을 당하고 어른 기분에 따라 폭언을 듣고 때로는 폭력에 시달린다. 그런 가정에서 부모는 아이가 빨리 독립하길 바란다. 그 집에 아이가 몸 둘 곳은 없다. 사내아이는 패거리들과 무리를 이루고 계집아이는 몸을 팔아 돈을 번다. 자마 세이라의 모친도 그런 식으로 성장했으리라. 그래서 딸이 자신처럼 열세 살에 남자를 상대로 일하는 현실에 거부감은 없었다.
---p.93~94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들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얼굴을 보인다. 문이 열리면 주먹을 들지 않는다.
문밖으로 굴러 나온 두 사람은 더 이상 남자가 쫓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에오는 욱신거리는 몸을 통로 벽에 기대고, 통로를 사이에 두고 실내에 우뚝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때려봐.
차봐.
이 통로를 건너와 봐.
어쩌면 그렇게 가슴속으로 도발했는지도 모른다.
그 남자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부들부들 떨며 스에오를 쏘아봤다.
스에오는 남자의 눈을 바라본 채로 몸을 일으키고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고 문을 닫았다.
쾅 하는 소리가 나고 남자의 모습이 문 뒤로 사라졌다. 스에오는 다시 벽에 기대어 쓰러졌다.
해 질 녘의 고요함.
어디선가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들리고 자동차 소리가 사라졌다 들렸다 했다.
동생은 끝내 울지 않았다.
“이렇게나 뽑혔어.”
동생은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뽑힌 머리카락을 스에오에게 보여줬다. 가느다란 갈색의 반짝이는 머리카락 몇 가닥이 스에오의 배 위에 놓였다. 마치 ‘꽃을 이렇게 많이 땄어’ 하고 보여주는 것 같았다. 두려움에 떨던 만 여섯 살 아이가 자기를 대신해서 매를 맞은 오빠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빠진 머리카락을 준 것이다. 스에오가 고개를 들자 동생은 걱정스러운 듯이, 하지만 살짝 미소 지은 얼굴을 보여주었다. 하세가와 쓰바사의 아파트에서 쓰바사가 아이리를 때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에오는 그 옛날 일을 떠올렸다.
---p.129~130

“그 정도 돈은 내가 카바레 클럽에서 반년만 일하면 갚을 수 있는데.”
카바레 클럽.
스에오가 어지간히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동생이 웃었다.
“오빠, 요즘 카바레 클럽은 물장사 축에도 안 들어가. 대학생도 용돈이 좀 궁하면 카바레 클럽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시대라고. 딱 1년만 샛길로 샐게. 오빠는 초밥 요리사가 되는 거야. 멋지잖아.”
이제 열여덟 살이 된 동생은 1년 후를 꿈꾸듯이 눈을 반짝였다.
동생을 멀쩡한 직장에 취직시키는 게 그의 꿈이었다. 부모가 있는 번듯한 가정의 남자와 사귀다 결혼을 하고 평범한 가족을 꾸리게 한다. 어릴 때 집에 남자 손님이 있으면 남매는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 밤에는 집 앞 공원에서 동생과 둘이 시간을 때웠다. 동생은 외등 아래에서 날아오는 벌레를 잡기도 하고 쫓아다니기도 하고 땅에 금을 긋기도 하면서 놀았다. 예쁜 눈으로 별을 바라보고 그네를 타고 노래를 불렀다. 기쁜 일이 있으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고 어이없는 일이 있으면 발을 동동 구르며 투덜댔다. 어머니 대신 동생을 키우면서 스에오는 동생이 어머니처럼 남자를 상대하는 모습만은 보고 싶지 않다는 다짐을 마음 깊이 새겼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어머니와 단둘이 두지 않았고 어머니가 하는 일 때문에 민망한 상황을 당하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고 나쁜 친구들에게서 떼어놓고 공부를 가르쳤다.
스에오는 지금 쓰바사의 집 벽에 기대어 앉아 내가 지금까지 해온 노력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p.134~145

한번은 아버지가 머리를 묶어준 적이 있다. 익숙지 않은 일을 하는 두꺼운 손과 아버지의 집중한 눈빛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미키의 남편에게는 그런 정이 없다. 폭력은 없었지만 대화도 없었다. 남편은 가족의 존재를 무시하고 살았다. 그저 직장에 나가고 퇴근해서 오면 드러누워 텔레비전을 본다. 알아서 술을 꺼내 마신 뒤 빈 병을 부엌에 내버려 두고 잔다. 미키는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장을 보고 집에 오면 빨래를 걷고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해서 널고 설거지를 하고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고 욕실을 청소하고 나와 빨래를 갰다. 겨우 잠을 자려고 보면 테이블에는 남편이 두고 간 컵과 접시가 있다. 남편이 미키를 챙기는 일은 없었다. 미키가 열이 나서 누워 있어도 이불 위로 넘어서 가버렸다.
‘저 사람 눈에는 내가 안 보이는 걸까?’
---p.196

왜 생트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냐고? 그건 그 공장을 아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려면 나의 한심한 모습을 모조리 공개해야만 한다. 몸을 가르고 ‘자, 보세요’ 하고 절개한 내장을 보여주는 거다. 사람들은 매우 흥미로워할 것이다. 하지만 난 그걸로 끝이다. 숨이 끊기고 쓰러져도 내 생사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저 구경거리가 된 내장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만 보겠지. 그리고 다 보고 나면 잡담을 나누면서 떠날 것이다. 지금 이 고성능 번역기 같은 여성에게 내 몸을 가르고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한 까닭은, 이 고성능 번역기는 용건이 끝나면 내 몸을 아래에서 위까지 빈틈없이 지퍼로 닫아줄 것 같기 때문이다. 난 회사에서 잘릴 것이다. 그래도 이 여성은 처음 만났을 때와 완벽하게 똑같이, 멸시도 연민도 동정조차도 하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은 공장에서 잘린 일을 낙심하지 않는다. 이렇게 여름 저녁노을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게 됐으니까.
---p.235

─ 죽은 여자들에 대해 제대로 보도해.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스튜디오에 흘렀다.
노기를 띤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 그딴 여자들은 쓰레기야. 동물 이하라고. 마음 내키는 대로 몸을 굴리고 언제 애가 생겼는지도 모르지. 애를 지울 돈도 없고 머리도 안 돌아가. 어쩔 수 없이 낳고 난 다음에는 죽어라 괴롭히며 키우지. 차라리 실종이라도 되면 좋겠다, 사고로 죽으면 보상금이라도 타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그것들이 애를 만드는 건 나라에서 주는 돈이 욕심나기 때문이야. 그래서 애가 죽어도 알리지 않고 돈을 계속 받는 거야. 당신들이 그런 일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며? 밝고 열심히 일하는 엄마라며? 나쁜 건 사회지 여자가 아니라며? 그럼 있는 그대로 보도하란 말이야!
스튜디오가 얼어붙었다.
─ 이제 돈 따윈 필요 없어, 죽은 여자에 대해서 제대로 보도하면 돈은 없어도 돼. 여자도 풀어주지.
남자가 그렇게 말을 끝마쳤을 때, 스튜디오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정적만이 흐르는 화면은 마치 정지 화면 같았다.
이윽고 아나운서의 딱딱한 목소리가 나왔다.
“동영상을 촬영한 분입니까?”
인터컴으로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고 있는지, 아나운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귀에 찬 이어폰을 손가락으로 더욱더 깊숙이 누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초조함으로 요동치는 눈을 힘주어 뜨고 강단 있는 말투로 멘트를 계속했다.
“여성은 무사합니까?”
그 말에 남자가 소리 없이 웃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사실 걱정 안 하잖아?
---p.271

“어머니가 아이들을 학대한 건 아닙니다. 적어도 본인에겐 그럴 의도가 없었어요. 하지만 당시 그녀는, 이를테면 돈을 받고 여자아이를 남자 무릎 위에 앉히는 행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딸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딸이 남자 무릎에 앉는 걸 싫어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어요. 열 살짜리 아이에게 자유의사란 있는 듯하면서도 없죠. 엄마가 해야 한다고 하면 싫어도 그 말을 따라요. 부모는 그걸 보고 싫어하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해석해요. 그 어머니한테는 자식들의 환경을 생각할 만한 지혜가 없었던 거예요.”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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