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잘 해내고 싶은 아름다운 당신을 위한 길안내문
쉽게 생각하면 삶은 끝나면 그만입니다. 내가 가진 것도 의미가 없어지고 같이 하던 사람들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음에 직면한 경험이 있던 사람들은 오히려 더 치열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자신과 인연이 된 것들을 무척이나 소중히 여깁니다.
죽음을 알 때 삶이 더 소중해지고 늙음을 알 때 지금 더 잘하게 되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끝을 생각하는 삶은 다릅니다.
누구도 비참하게 생을 마무리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본능적인 사람의 마음은 너무도 당연해서 굳이 이야기 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생각만큼이나 잘 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당장 삶에 쫓겨 늙음과 죽음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늙음과 죽음이라는 삶의 마무리를 생각하며 사는 것은 오히려 지금의 삶을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삶의 방향을 명확하게 해주어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성장하고 또 늙어갑니다. 이 책을 펴든 당신은 아무래도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를 한번쯤은 생각해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지금도 잘 해내려고 노력하며 끝까지 잘해내려고 마음먹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잘해내려면 지금부터 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있다면 삶은 계속해서 좋아질 것입니다. 삶이 계속해서 좋아진다면 눈감는 순간이 안타깝고 슬픈 것이 아니라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 될 것입니다. ---「서문」
# 포용은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보통 포용이 필요한 때라면 ‘이해해보려고 노력해보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미 나누고 따지는 일이라 포용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상대를 이해함으로써 포용했다고 주장한다면 그냥 참고 있다는 뜻일 뿐입니다.
“포용은 이해를 멈출 때 가능한 것입니다.”
포용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고 마음은 논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은 포용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어떤 가치 판단도 두지 않는 것이 포용입니다.
# 마음으로 늙음과 죽음을 받아들이면 생각은 지금 여기에서 잘하기 위한 최상의 도구로 변하며 자신은 생각의 구속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서 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본 사람들이 잘 삽니다. 사람은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면 그것을 더이상 생각으로 따지지 못합니다.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죽으면 어떡하지?’하고 걱정은 하면서도 마치 천년만년 살 것같이 시간을 허비하던 삶은 ‘끝나기 전에 잘하자!’는 마음으로 지금 여기에서 잘하며 늘 행복한 삶으로 바뀝니다.
지금 여기에서 잘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지금 여기에만 신경쓰면 미래를 대비하지 못해 힘들어지지는 않을까요? 걱정마시고 지금 여기에서 잘하십시오. 현재는 미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서 잘하는 것이 나중에 잘사는 법이고, 끝까지 잘해내는 법입니다.
# 쉼은 선택이 아닙니다. 겨울이 오거나 오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쉬는 것은 사실상 쉬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에만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 즉, 재충전과 회복이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쉬어야 할 때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삶의 여정에서 어두운 밤과 같은 시간은 다만 찬란한 아침을 맞이하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임을 알고 나면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 마무리를 생각하면 마음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지금 스스로 비참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끝까지 비참한 생을 살다가 떠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마무리를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잘못하면 삶이라는 작품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질문을 하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면 그것이 인연을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당겨져 온 인연이 답을 줍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고 질문을 했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그것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질문을 했다면 ‘그것을 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답으로 얻습니다. 이제 답을 얻었고 답대로 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이 목표를 어떻게 현실로 만들까요?
# 괜한 비난을 들은 것이 바로 자신이 지은 업보가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자신이 받아들였다면 그 업보는 일단락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나’가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를 원망하고 불평하여 다시 좋지 않은 업業을 짓습니다. 그렇게 ‘보통은’ 부정적인 업보의 순환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괜한 비난을 한 사람은 사실 자신을 이 업보의 순환고리 속에서 구해주신 구세주인 셈입니다. 그러니 왼뺨을 치거든 오른뺨도 내미는 것은 물론이고 감사 인사도 빼먹지 말아야 합니다.
# ‘아, 정말 우리 엄마 사람을 정말 피곤하게 만든다.’해 보십시오. 자신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엄마의 아들이 됩니다. 엄마가 오면 아들이 되는 것과 같이 피곤하게 만드는 엄마가 오면 피곤하게 만드는 엄마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피곤하니까 공부는 물론이고 엄마 기분좋게 할 일은 하나도 안합니다. 그래서 사는 게 점점 피곤해집니다. 피곤한 사람 아들이니 피곤해지는 것이 맞습니다.
삶은 자신이 선택해 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오든 긍정적으로 보면 지금 상황이 나빠보여도 점차 나아지게 됩니다.
#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고통이라는 신호가 없다면 균형이 깨져도 모르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우리가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 피할 것도, 맞서 싸울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느껴지면 먼저 자신이 어딘가에 치우쳐져 있지 않은지 살피고 균형을 회복하는 쪽으로 노력하면 됩니다. 예를들어, 폐암에 걸렸다면 ‘아 내가 몸을 치우치게 써서 몸이 알려주시는 구나. 감사하구나.’해야 균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 특히 염성은 생명의 생성과 유지의 근본적인 역할을 합니다. 예를들어 닭고기와 오리고기를 먹어보면 오리고기가 더 짭니다. 수명을 비교해보면 닭은 20~30년 정도 사는데 비해 오리는 50~60년 정도 삽니다. 활엽수와 침엽수를 비교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를 씹어먹어보면 더 짜게 느껴지는데 활엽수에 비해 침엽수가 더 푸르게 오래갑니다. 이는 계절을 살펴봐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이 움트는 입춘이 되면 염성기운이 곳곳에 필요합니다. 음력으로 3월쯤 되면 모든 싹이 다 올라오는데 3월달에 장을 담으면 정월에 담그는 것보다 소금이 훨씬더 많이 필요합니다. 염성이 가진 기운은 새로운 생명이 시작될 때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새 싹이 올라오는 봄에는 아무리 소금을 많이 넣어도 풀이나 나무에 염성을 빼앗깁니다. 그래서 조상들은 대대로 봄에 새싹이 올라오기 전인 정월에 장을 담가왔습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예순 한 살이 되면 회갑이라고 합니다. 회갑이면 육십갑자로 따져 한 바퀴 돌아본 셈이니 삶 전체가 좀 보이는 나이가 이 정도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정도로 성숙했으면 이제부터 써먹을 데가 무궁무진합니다. 그렇다면 이 때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이 나이가 지나가면 늙었으니 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는 이 나이에 은퇴를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직장이 아니더라도 가정이나 사회에서 이 완성된 사람들을 쓸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면 술을 담구어서 익을때쯤까지 기다렸다가 버리는 꼴입니다.
# 분노와 좌절을 코칭으로 해결하려면 무엇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언제 무슨 일로 상처를 받았는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그리고 잘 살펴보면 자신이 상대에게 무언가 바랬기 때문에 만들어진 상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발견하면 바라고 있던 자기의 탓이니 자기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원망하며 붙들고 있던 상대를 편안하게 인정하고 보내줌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 아침에 일어나서, 혹은 자기 전에 자신이 느끼는 문제에 대해 자기에게 물어보십시오. ‘이 일은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눈을 바로 뜨고 세상을 보면 짧게는 몇 분안에 길면 며칠안에 우주가 당신을 위해 응답합니다. 우연히 신문기사를 통해 원하는 것을 이루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떠오른다든지,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사람에게서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기도 합니다.
다만 여전히 따로 ‘나’가 존재한다는 착각이 눈을 가리면 그 응답을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하느님이라 부르든 부처님이라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자기 내면의 소리를 잘 듣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자기에게 묻고 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도이며 명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삶의 인도자입니다.
# 찬란한 아침을 맞이하고 활기찬 낮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밤입니다. 또, 눈부신 봄에 싹이 터서 가을에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겨울입니다. 이렇게 모든 자연의 순환에는 ‘끝나지 않았지만 멈춰버린 듯한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쉼, 즉, 휴식이라고 부릅니다.
이 휴식의 기간 동안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지만, 사실은 멈춰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 모든 고장 난 것이 고쳐지고, 새로운 생명이 잉태됩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대단히 바쁜 재충전의 시간인 셈입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