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손히 허릴 굽히고 난 후 내 소개를 하자 그는 활짝 웃음을 머금으며 악수를 청한 채로 입술을 움직였다.
「나 최금동이야! 우리 작가협회 한 가족이 된 걸 환영하며 진심으로 축하해.」
나는 그의 존함을 듣는 순간 크게 놀란 나머지 내민 그의 손도 잡지 못한 채 멍해 있었다. 내가 시나리오 작가 수업을 하면서 수없이 보아온 많은 영화 속에서 선생님의 존함을 많이 보아왔다. 선생님의 시나리오는 유독 깊이와 무게감이 남달랐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존경심을 금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의 존함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고 선생님의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꼬옥 감싸며 화답하는 나는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뿌듯함과 기쁨에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지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관계로 협회에는 자주 들리진 못했지만 회원들의 애경사나 정기총회 때엔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참석 이유도 이유였지만 선생님을 뵐 수 있다는 기대감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선생님이 언제나처럼 계시는 위원장실엘 갔다. 선생님이 흥분된 어조로 누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한테 원고 맡기면 늦어진다는 거 모르고 맡겼나? 시나리오가 밀가루 반죽해서 만드는 무슨 물건인 줄 아는 모양인데, 나와의 계약은 없던 거로 하시오. 내 쓰던 원고지는 불쏘시개를 할망정 당신네 영화사엔 팔지 않겠소!」 하며 철컥 수화기를 탁 내려놓았다.
---「꼬장꼬장한 노인」중에서
한 시대를 고하는 1970년대가 사라지고 극악무도한 무리들이 정권 찬탈을 위해 수많은 민주시민을 참살하고 폭도들이란 누명을 씌워 정권을 잡은 신군부의 등장으로 나라의 운명은 거대한 회오리 속으로 휘말리게 되었다. 양심 있는 학자와 불의에 항거하는 언론인들은 언론 정화라는 적반하장의 미명 하에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고 국민이 볼 수 있고 읽을거리인 잡지나 주간지들이 퇴폐문화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폐간 조치되었다. 국민의 방송으로 자리매김한 동양TV(TBC)가 문을 닫게 되는 날 고별방송을 위해 가수 이은하가 눈물을 보이지 말라는 규정을 어기고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부르다 솟구치는 감정을 참질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해서 ‘방송 출연 10개월 정지 처분’이란 벌칙을 받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지나가던 소도 웃고 개도 웃을 일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 국장과의 연락 두절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내 몫까지 부탁해」중에서
인천 공항은 언제나처럼 많은 사람이 붐볐다. 쇼디의 출국 수속이 완료됨과 함께 탑승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제 들어가 봐, 쇼디야!」
나는 꽉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놓으며 말을 했으나 나도 모르게 울먹임 소리가 나왔다.
「안녕히 계세요, 사장님!」
그 역시 눈가에 이슬이 맺히며 나를 바라본 채 천천히 뒷걸음질을 하였다. 나는 어서 가라는 듯 손짓을 하였다. 시야가 점점 멀어짐에 따라 그는 몸을 돌려 앞을 보고 걷기 시작하였다. 걸으면서도 그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치 못하는 듯 손등을 눈에다 갖다 떼고 하는 동작을 반복하더니 어느 틈엔가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 역시도 가슴 찡한 허전함을 안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 후 쇼디와 헤어진 첫 크리스마스를 맞는 이브의 밤이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듯 하얀 눈이 소록소록 내리고 있었다.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란 문자가 날라왔다. 우즈벡의 쇼디로부터 온 문자였다. 국민 대다수가 타 종교를 신봉하는 나라에서 교회를 다니는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준 그의 갸륵한 마음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것 같아 감사함과 함께 흐뭇한 마음을 만끽할 수 있었다.
---「아듀 소디」중에서
어디 그뿐인가. 늙으신 홀어머니를 둔 범인이 감옥에서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가 동료들과 더불어 박봉을 쪼개고 모금 운동을 벌여 범인이 형량을 마치고 출소하기까지 그의 노모를 돌봐온 사실은 미담 중에 미담이겠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이런 사실이 밖으로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뜻에 의해 손이 근질거려도 기사를 쓰지 못하고 있다는 석 선배의 말이고 보면, 그는 정녕 낮은 자세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한국 경찰의 자화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천하의 포도대장」이란 호칭은 언제 들어도 어색함이 없는 것 같다.
---「천하의 포도대장」중에서
현재까지 한국영화 액션 영화배우 중에서 상징적인 인물을 꼽으라는 질문이 있다면 나는 단연코 ‘장동휘’ 선생을 말할 것이다. 그는 과묵한 성품에서 풍겨 나오는 카리스마로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관객들로부터 이미 인정받고 친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57년 김수동 감독의 〈아리랑〉으로 38세의 늦은 나이에 영화계에 들어와서 연이어 500여 편에 출연하였는데 건장한 체격에 매서운 눈, 화통한 목소리와 특유의 너털웃음, 선 굵은 액션 연기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전쟁 영화의 신화처럼 여겨지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사나이들의 의리와 액션을 그린 〈팔도 사나이〉 그리고 범죄극인 〈뒤돌아보지 마〉와 〈경찰관〉 등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에서 박노식, 허장강, 황해, 전원윤, 독고성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더불어 한국영화 황금기라 할 수 있는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이끌어 오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액션 배우로서 손색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인간미 넘치는 맏형」중에서
「김 작가, 김영광 의원 알지?」
어느 날 협회에 들른 나에게 신문을 뒤적이고 있던 서윤성 선배가 무심코 묻는 말이었다.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잘 모릅니다. 헌데 왜요?」
나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앉으며 의아하게 물었다.
「반공 드라마나 시나리오를 쓸 때는 간혹 정부 당국자나 정보기관장들에게 북한 실상에 대한 한계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되는데 그의 진보적인 판단력과 합리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나 우리가 글을 쓰는 영역에 있어서도 그만큼 폭을 넓혀주고 있는 거야. 말하자면 우리 국민 의식 수준을 높이 인식하고 있는 그의 판단력에서 나온 평가인 셈이지. 며칠 전에 신문을 보니까 「한국 국민당」이 창당됐는데 「유정회」에서 국민당으로 참여하면서 사무총장직을 맡게 됐더구만. 내가 박정희 친위대나 다름없는 유정회 의원이었던 그를 굳이 말하려는 이유는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정치판에서 우직하리만큼 소신에 찬 그의 변함없는 기개 때문이야. 그는 몇 년에 불과한 의정활동 속에서도 입법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어. 자칭 농민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그였기에 농가 부채 탕감법은 차치하고라도 구정 공휴일 안건과 통행금지해제법안을 발의하여 통과시킴으로써 국민 삶의 질을 높이고 편의를 제공하는 큰 역할을 해줬고 앞으로도 이에 못지않은 활동을 기대해볼 수 있는 인물로 보기 때문이야.」
---「소신의 정치인」중에서
「쇼디도 결혼식을 십일월 달로 정해놨었는데 사장님이 요디 결혼식에 오실 거 같아서 걔도 유월 이십오일로 앞당겨놨대요.」
「어허, 이런 놈들 봤나, 내가 갈지 안 갈지도 모르고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해?」
어이 없어하는 나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듯 고밀은 이내 입을 열었다.
「사장님이 딱 부러지게 ‘노’ 안 했으면 오시는 거나 같다는 말을 했어요.」
「녀석들,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 있구만. 좋다, 가자, 간다구 해라!」
「알았어요, 사장님. 바로 전화할께요.」
「사실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사모님두 몇 번 말했어. 자식 같은 너희들이 우리집에 와서 고생한 걸 생각하면 당연히 참석해서 축하해줘야 한다구 말야. 그래서 내 마음도 그쪽으로 기울고 있던 중이었어. 그러면 코빌이 나하고 사모님 들어갔다 나오는데 에스코트하기로 하구, 우리 직원 중에 그즈음에 들어가야 되는 사람 있나?」
「예, 쇼일이 유월 십구일 날 들어가야 돼요. 비자갱신 때문에요.」
이번에는 신이 난 듯한 코빌의 대답이었다.
---「요디의 결혼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