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쓸 때 정말 결정적인 순간은 첫 문장, 첫대목을 어떻게 시작할까 하면서 텅 빈 허연 공간을 쳐다볼 때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아니 그래서일 거라 거의 확신하는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글의 첫대목에 다음의 ‘그림’을 제시해 놓았습니다.
--- p.23
요지는 무엇인가요? 우선 그들이 쓴 『천 개의 고원』은 비록 그들 두 사람이 썼다는 것을 책 표지에 명기해 놓긴 했으나, 그들 자신이 썼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책이건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일인칭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이 이 책을 써서 발간했으나 도무지 내가 썼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p.30
이들은 『천 개의 고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책을 써서 세상에 퍼뜨려 놓고서는 그 책을 쓴 자가 “‘나’라고 말하건 하지 않건 더는 아무 상관이 없는 지점에 도달하고자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들이 ‘저자(著者, author)’를 문제 삼은 뒤 풀이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흔히 저작권이니 지적 재산권이니 해서, 따지고 보면 인류 전체의 성과물일 수밖에 없는 것을 배타적인 자본으로 삼는 자본주의적인 제도는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셈입니다.
--- p.31
책을 다양태로 결론짓더니 결국에는 ‘기관들 없는 몸’으로 귀착되었습니다. 다양태는 중심이 없이 이리저리 엮여 있는 그물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물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방식이건 씨줄과 날줄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만들어진 것도 있고, 그물을 형성하는 줄들이 아무 법칙도 방향도 없이 얼기설기 무작위로 연결된 것도 있습니다.
--- p.58
첫대목의 “하나의 고원은 항상 중간에 있지 시작이나 끝에 있지 않다. 하나의 리좀은 고원들로 되어 있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고원은 달랑 하나의 지대(地帶)로만 고립해 있지 않고 여러 다른 고원들과 얼기설기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러합니다. 무수히 많은 다른 고원들과 연결되어 있기에, 하나의 고원은 항상 중간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고요.
--- p.81
우리가 이해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에 따르면, 구체적이건 추상적이건, 미시적이건 거시적이건, 단순하건 복잡하건, 단일하건 복합적인건, 개별적이건 보편적이건 간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에는 대개 분절의 선들, 분할의 선들, 그리고 탈주의 선들이 있습니다. 특히 책이 그러합니다. 책 역시 존재하는 것 중 하나임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책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여느 다른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내용이 무한하다고 할 정도로 워낙 풍부하고 복합적입니다.
--- p.110
연필과 연필을 조성하는 나무, 흑연이 따로 분리해서 현존하지 않습니다. 단지 서로 구분될 뿐입니다. 이를 중시하게 되면, 인식의 판면과 존재의 판면이 따로 분리해서 성립하지 않고 서로 구분될 뿐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바탕면을 통해서 배치 장치들이 구성된다고 말하거나, 배치 장치들을 통해서 바탕면이 구성된다고 말하거나 크게 차이가 없는 것이 됩니다.
--- p.139
요컨대, 리좀은 다양태를 바탕으로 하면서 다양태를 형성한다는 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것들을 이렇게 네 대목으로 나누어 서술하지만,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이 각 대목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일부를 따내어 활용하고, 다시 다른 곳을 비집고 들어가는 식으로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덩달아 리좀이 작동하는 방식을 흉내 내는 식으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 p.157
이 모든 연결접속 관계를 한꺼번에 떠올리다 보면, 책이라는 언표적 영역과 실제의 다른 영역들 사이에 위계 관계를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원본과 복사본의 위계에 관해서도 말할 수 없고, 토대(근거)와 상부(실제)의 위계에 관해서도 말할 수 없게 됩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항 논리적인 이분법적 사유의 논리와 그에 따른 지배-피지배의 정치적인 권력 관계를 말할 수 없게 됩니다.
--- p.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