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하게 빗어내린 머리에 우아하고 세련된 정장을 차려입고 흐트러짐 하나 없는 자세로 넓은 유리창 앞에 서서 멋진 야경을 내다보는 여성의 이미지. 그녀의 코트에는 보푸라기가 일지 않을 것이고, 머리카락은 뻗치지 않을 것이며, 그녀의 널찍한 아파트 어디에서도 꽉 찬 쓰레기통이나 아직 개지 못한 빨래 더미, 머리카락이 잔뜩 엉킨 빗 따위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 pp.9~10
내가 정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뭔가를 계획한 대로 끝내지 않고 다음 일을 벌이는 버릇, 그러면서도 중도에 포기했음은 인정하기 싫은 데서 비롯되는 일이었다. 여지를 두는 것이다. 나는 곧 돌아올 것이라고 가짜 약속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대신 정리하는 것도 질색한다. 너저분하게 늘어놓긴 했지만 나는 ‘아직 작업 중’인데 방해를 받는 셈이라 그렇다. 그런 현실부정이 몇 달째라도 말이다.
--- pp.21~22
주말에는 써야 할 원고를 마무리 지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므로 주말 아침 나는 진한 에스프레소를 좍 들이켜고 팔을 걷어붙였다. 그 순간 갑자기 내 안의 ‘정리 필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사방에 치울 거리가 넘쳐났다. 나의 능력과 시간 부족을 핑계로 오랫동안 혼돈 구역으로 내버려둔 서랍 안이 거슬렸고, 몇 달간 별생각 없이 잘 써왔던 그릇장도 이제 보니 너무 뒤죽박죽이라 새로운 분류 체계가 시급해 보였다. 식기건조기, 전자레인지, 오븐 등의 가전과 스테인리스 재질의 주방 기구에 덮인 얼룩도 철퇴를 내려야 할 대상에 올랐다.
--- p.51
삶의 호흡이 그렇게 가빠질 때면 비어 있는 서랍을 열곤 한다. 공간이 넉넉한 벽장을 연다. 괜히 수납장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그리고 아직 빈 공간이 있음에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아직 이번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빈 공간이 있다. 나는 작고 좁은 공간에 갇혀서 몸부림치고 있지 않다. 임시 저장소가 바로 여기 있다. 발 뻗을 곳도 있고, 무언가를 잠깐 놔둘 공간도 있다. 정리할 수 있다. 나는 여유가 있다. 나는 내 공간을 지배할 여력이 있다.
--- p.66
먼 옛날 중국에는 ‘살천도(殺千刀)’라는 고문법이 있었다고 한다. 칼로 천 번을 베어 천천히 죽이는 고문이라는데, 마르코 폴로의 중국 여행기를 바탕으로 쓴 소설에서 처음 알게 된 뒤로 소설의 다른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고 이 고문 이야기만 또렷이 남았다. 그 후로 어쩐지 ‘5분 효율’과 관련된 조언을 들을 때마다 살천도 이야기가 떠오른다. 여기에서 5분, 저기에서 5분 떼어 빈틈없이 쓰는 일이 근사한 나를 만들기보다는 느슨하고 평화로운 나에게 조금씩 생채기를 내는 기분이다.
--- pp.79~80
일관성, 통일성, 정연함. 이런 상태를 전혀 즐기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스포츠 팀을 응원할 때 같은 색 옷을 맞춰 입으면 왠지 더 기운이 난다. 똑같은 제복을 차려입고 한 몸처럼 절도 있게 움직이는 퍼레이드를 보면 절로 환호가 터진다. 정확하게 각도를 맞춰 리듬을 타는 아이돌 그룹의 군무를 보면 어떤 쾌감마저 느껴진다. 그렇지만 미국에 살면서 집집마다 잘 가꾸어진 정원을 볼 때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 p.97
큰 회사 내에서 조직 변경은 아주 흔한 일이다. 잦을 때는 6개월에 한 번씩 부서 이름이 바뀌고 윗윗윗사람이 바뀌며 몇 년마다 한 번은 소속 회사가 바뀔 때도 있었다. 이럴 때 저 윗사람들의 시선은 내가 집 안 정리할 때의 관점과 비슷할까, 문득 궁금했다. ‘이 서랍에는 이것을 넣어두었지. 하지만 쉽게 꺼내 쓰지 않게 돼. 저 서랍은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넘쳐나는군. 좀 꺼내서 다른 곳에 넣고, 이건 아무래도 안 쓸 듯하니 그냥 버리고, 이 상자는 저 방에 두는 게 나을 것 같고….’
--- p.107
우주 안의 모든 것들이 무질서로 향한다.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나는 점점 그것에 쓸려 간다. ‘내 마음대로’ 방치한다고 믿고 ‘내 의지대로’ 망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저 자연적 엔트로피에 쓸려 갈 뿐이다. 망치를 들고 때려부수는 것보다,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책들이라도 정리하는 것이 훨씬 더 엔트로피에 반항적이다.
--- p.133
어차피 우리 모두 무(無)로 돌아가는 삶에서 고작 책상 하나 정리하는 일이란 아무 의미 없는 파닥거림으로 폄하될지 몰라도 나라는 개체가 있는 시공간에서 정리는 절대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무질서로 내달리는 세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우주에서 내 작은 공간은 내가 사수한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잊혀짐에 대항해 싸운다. 얌전히 가진 말자.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자. 반항하자. 엔트로피에 쓸려 가지 않기 위하여.
--- p.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