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봉건 사회 별당 아씨 취급을 받는 것도, 나는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오빠랑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아닌 척 그러려니 넘기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알지도 못했다. 모든 것에 그냥 안착하고 적응하는 내가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실상은 그 어느 것도 적응되지 않았고, 부정하고 저항하고 좌절하고 일어나는 수 없는 과정을 겪은 지금에야 귀댁의 영애도 차별받는 딸도 아닌 정순임으로 살아내기 위해 애썼다는 걸 안다. 나는 사람 정순임이다.
---「015_밖에선 별당 아씨, 안에선 가시나」중에서
대구에서 생활하셔서 대구와 상주 본가를 오가셨던 할아버지가 어느 날 “아가, 니가 이러고 있으면 우리 집은 끝이다. 제발 좀 일나거라.” 눈물로 말씀하셨단다. 그날 이후 몸을 일으킨 엄마는 평생 해보지 않은 농사일을 직접 하시면서 우리를 키우셨다, 두 번의 불천위를 포함 6대 봉사를 하는 집, 그 많은 제사와 60상부 묘사가 있는 종가 맏며느리인 엄마는 서른둘 그날부터 혼자서 우리집을 지켜낸 것이다.
---「054_나도 출세하면 안 돼?」중에서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랑이라고 믿었기에 용감하게 결혼이란 걸 했고,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내게로 왔고, 나는 그 아이들과 세상을 잘 헤쳐나왔으니. 그리고 저거 아빠를 미워하지 않는 아이로 키웠고, 어떤 이야기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로 커 주었으니 그것으로 됐다. 결혼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가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딸보다 더 나은 버팀목은 없다. “이혼해줘서 고맙다는 딸들은 세상에 너거밖에 없을 끼다. 딸들, 엄마도 고맙다!”
---「095_결혼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중에서
새벽 다섯 시 메주 솥에 불을 넣으러 나가도 눈길 한 번을 주지 않는다. 콩을 씻으려고 하면 “가마이 놔둬 니가 뭘 안다고!” 장작을 더 넣을까 물어도 “가마이 놔둬 니가 뭘 안다고!” 메주를 쑤는 긴 시간 동안 나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엄마가 부리는 심통을 받아야 했다.
---「145_니가 뭘 안다고!」중에서
무릉도원인 고향이란, 그냥 한 번씩 다녀가는 것이 최선이겠구나. 결론에 닿고 닿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열흘에 한 번, 안동집에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귀향하면서 그렇게 4년째가 되던 그날, “오빠야 이제 나한테 아무것도 하지 마.” 그 한마디를 하고 가출을 단행하고 말았다. 이렇게 가다가는 내게 남은 엄마에 대한 사랑까지 다 갉아 먹힐 것 같은 불안이, 부정맥으로 오락가락하는 심장이 어느 순간 딱 멈출 것만 같은 두려움이 발걸음을 밀었다.
---「149_우리 사이에는 ‘사이’가 필요하다」중에서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상처받지 않는다. 사랑하면 그만큼 기대하고 기대가 어긋나면 화가 나고 서로에게 아픈 말들을 하게 되는 거니까.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런 가능성은 커지고 그중에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 가족이다. 진짜 다 너를 위해서라고 해놓고 내 기대에 어긋났다고 화를 낸다면 가족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165_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이름」중에서
대학 시절 소위 운동권 학생이었던 내가 수배를 당해 도망 다닐 때 기도원에 많이 숨는다는 말은 어디서 들었는지 몇 날 며칠 온갖 기도원을 찾아다니고, 학교를 휴학하고 공장에 취업 했을 때도 친구들도 두엇만 알던 비밀스런 장소를(숙소가 드러나면 잡혀갈 수 있는 탓으로) 물어물어 찾아오셨다. 고집 센 딸이 끝내 엄마를 따라가지 않고 석 달 동안 공활을 마칠 거라는 걸 알았을 텐데도, 엄마는 그랬다.
---「179_엄마가 버텨낸 시간들」중에서
25대를 이어온 우리집 장맛을 잇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 어머니에게 된장, 간장, 고추장, 담북장, 집장 담는 법을 배우고 그것을 상품화하고 된장 회사를 꾸려 가는 것이다. “엄마는 장 담그는 법을 어떻게 배웠어?” 묻는 나에게 “그냥 어깨너머로 보고 배웠지” 하시는 엄마는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보면 알아서 척척 하기를 원하셨고, 못 미더우신 탓에 된장 끓이는 가마솥에 불 넣는 일까지 당신이 해야 안심을 하셨다.
---「183_오십이 넘어 가출이라니」중에서
내가 엄마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내가 우리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엄마가 알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있어 나는 내 딸에게 당신보다는 조금 더 나은 엄마가 될 수 있었다. 모든 문제를 다 풀어야 할 필요는 없다. 가끔 답이 필요하지 않은 문제들도 있는 것이니까.
---「199_곧 당신께 돌아가겠습니다」중에서
산수헌(山水軒)은 고향집 당호이다. 우복 정경세 종가이고 국가민속문화재다. 고추장, 된장, 간장 담는 법을 배우고 판매하는 일을 하는 것이 내가 귀향한 이유다. 브랜드 이름을 정하면서 산수헌을 선택한 것은 대대로 이어온 장맛에 가장 부합하는 이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상들이 살아오신 길과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 같은 이름으로 만나도 되나 하는 고민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229_산수헌의 나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