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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달이 떠오릅니다

분홍달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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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4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88g | 128*205*20mm
ISBN13 9788966551583
ISBN10 8966551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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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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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무렵의 해는 높이 오르고
햇빛은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아파트 유리창마다 햇살에 찔린 자국들
길다란 화분들이 조금씩 야위어 갔다

마른 풀 위로 사과가 떨어지고
허기진 개미들이 몰려들었다
비명도 없이 쓰러져 가는 날것들
누가 마른 잎 한 장 덮어주랴

소리가 없는 것들은
적막한 혀를 가지고 있을 거야
노래를 불러줄까
쓸쓸한 나의 노래는 늘 낮은음자리
중얼거리는 손가락들이
주머니 속에서 꿈틀거렸다

반성도 후회도 희미해져 가는 이마 위로
날이 저문다
발자국 소리가 없다
---「10월」중에서

바람길이었을까
얼기설기 엮은 철망 사이로 사라져간
그대의 손, 손
번쩍이는 불빛 몇 점 보았을 뿐인데
흔들리는 노래 잠깐 들었을 뿐인데
바람은 아무 말 없이
너의 등을 밀었지
텅 빈 시멘트 바닥을 울리던
아 아
죽음은 지천으로 널리고
새롭지도 않아서
쉽게 잊혀져 가고
낡은 비상구만 즐비한 이곳에서
붉은 새가 된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붉은 새」중에서

사각형 수조
어린 구피들이 사라져갔다
어떤 이는
어미 구피가 배가 고파 잡아먹었을 거라 했고
어떤 이는 크고 강한 입을 가진 늙은
금붕어의 소행일 것이라 했다
나는 청소부 비파에 대해 강한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온종일 돌 위에 찰싹 붙어 있던 비파는
가끔씩 유리 뒤에 달라붙어 나를 살피곤 했다
어린 구피는 찾을 수 없고
소리 없이 흔들리는 수초 사이를
유유히 헤엄쳐가는 금붕어의 비늘이 반짝거릴 뿐
비파와 나는
오늘도 눈이 마주쳤다
---「소문」중에서

바람 불고
배롱나무꽃들 가려움에 부풀어집니다

몽글몽글 진분홍 꽃을 보아요
그녀의 립스틱처럼 도발하네요
태풍이 몰려와요
휘청거리는 나뭇가지를 붙잡아 줘요
펄펄 흩날리는 꽃
사랑 따위는 잊어버려요
당신의 머리 위에 화관처럼 빛나고 싶어요

꽃이 지는 저녁
앞서 걸어가는 사람 뒤로
배롱나무 한그루
마른 손을 흔들며 따라갑니다
휘청거리며 멀어집니다
가장 낮은 땅 위로
분홍달이 떠오릅니다
---「분홍달」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박영선 시인의 이 시집에는 어떤 절제의 현장들이 많다. 이 현장들도 시인의 정직이 만들어낸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곧이곧대로 말하고 표현하는 것을 ‘정직’이라고 부르지만, 시에서 정직은 사물과 사건에 대한 시인의 태도에서 드러나지 진술의 표면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명료한 인식에서만 정직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알면 아는대로 모르면 모르는대로 사물과 사건을 대할 때 정직이라는 미덕이 펼쳐지는 것이다.
- 황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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