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가 지금까지의 수많은 형태가 초래한 위기를 극복하고, 문화적으로 크게 변화하는 이 시대의 도전에 고무적인 해답이 되고자 한다면, 지금까지의 정신적·제도적 경계를 과감히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자기 초월 시대가 열렸다.
--- pp.19~20
신앙의 진정성에 대한 기준을 찾고자 한다면, 인간이 자기 말로 고백하는 것에서 찾지 말고, 신앙이 자기 존재, 자기 마음에 파고들어서 변화시킨 정도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 자연, 사람, 삶, 죽음과 생생한 관계에서 신앙이 드러나는 방식에서 그 기준을 찾아야 한다.
--- p.36
그리스도교에서 예배는 인간에 대한 봉사와 분리될 수 없으며,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지식과 분리될 수 없다. 신학이 인간에 대한 봉사의 필수 요소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려면, 신앙의 경험, 즉 인간 삶과 사회에서 그 현존을 반드시 반영하는 맥락 신학이어야 한다. 신학은 문화와 역사적 변환의 맥락에서, 즉 인간, 문화, 사회, 역사를 다루는 여러 학문과 대화하며 신앙을 성찰해야 한다.
--- p.41
삶을 관상적으로 접근하면, 인간 삶은 독백에서 대화로 변화한다. 대화에서는 인간의 자기 주장, 자연의 기술적 변환, 권력에 의한 사회 조작 그 이상의 것이 관건이다. 즉 세계와 역사에 대한 공학적 접근이 아닌 무언가가 중요하다. 침묵을 지키고, 경청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진정한 답을 찾으려고 끈질기게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을 기술적으로 조작하는 접근 방법이 관상적 접근 방법으로 수정되지 않는다면 인간 세계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 pp.51~52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잘못된 노화”가 이뤄질 위험이 있다. 개혁의 시기를 놓치거나, 심지어 정오의 위기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려고 한다면, 불임의 닳아빠진 그리스도교의 형태를 낳을 수 있다. 현재의 위기를 신학과 영성의 심층적인 변화 없이 교회의 외적 개혁만으로 경솔하게 해결하려는 시도도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 p.61
하느님을 자연과 역사를 감독하는 무감정의 전능자라고 생각한 이미지에 닥친 위기는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게 십자가 신학을 재발견할 기회이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친 예수님을 통해 파토스적 사랑(정열적이고 고통받는 사랑)을 보여 주신 하느님을 찾을 기회이다.
--- p.120
그리스도교의 오후는 아마도 파스카 축제일 아침이 지난 뒤 예수님이 오셨던 방식으로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손, 옆구리, 발에 난 상처를 만져서 알아본다. 하지만 그 상처는 변화된 상처일 것이다.
--- p.138
전 세계 사람들이 같은 제품과 기술 발명품을 사용하고,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컴퓨터 게임을 하며, 같은 화폐를 사용한다는 사실만으로 인류가 한 가족이 되지는 않는다. 인류 화합이나 그리스도인 일치의 과정은 단일화나 표준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상호 인정과 보완, 시야의 확장, 일방성 극복을 목적으로 한다.
--- p.166
사랑은 하느님의 속성 중 하나가 아니라 그분의 본질이자 그분의 고유명사이다. 하느님 이름을 말하는 것이 금지된 이유 중 하나는 사랑을 말로 속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오직 자기 삶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 자기 삶에 의해 입증되지 않은 말로 사랑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건 하느님 이름을 헛되이, 근거 없이, 즉 터무니없이 내뱉는 것과 같다.
--- p.210
무신론은 신앙심이 깊은 그리스도인에게 유익할 수 있지만, 무신론자들에게는 위험하다. 무신론은 불과 같다. 착한 하인이 될 수 있지만, 나쁜 주인이 될 수도 있다. 신앙심이 깊은 그리스도인은 문제 있는 많은 종류의 유신론에 맞선 “무신론자”이다.
--- pp.261~262
역사의 변화 물결 속에서도 우리 신앙이 여전히 그리스도교적 신앙으로 남아 있으려면, 그 정체성의 표징은 케노시스, 즉 자기 비움, 자기 헌신, 자기 초월이다.
--- p.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