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사상가 빅터 파파넥은 (중략) 디자이너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소양으로 “문제들을 인식하고, 명확히 하고, 정의하고, 또한 해결해내는 능력”을 강조했어. 또 캐나다의 디자인 철학자 글렌 파슨스는 (중략) “디자인은 새로운 유형의 사물을 위한 설계도의 창조를 통한 어떤 문제의 의도적 해결이다”라고 정의했지. 여러 디자인 사상가가 공통으로 언급하는 키워드는 ‘문제 해결’이야. 다만 글렌 파슨스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디자인은 주어진 문제를 익숙한 방식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라고 볼 수 있지.
--- p.18 「1 '디자인'이란 말의 의미」중에서
디자인에서 문제 인식은 디자인을 둘러싼 맥락적 배경을 살피는 거야. 특히 기존 디자인 대상이 쓰였던 기능적 배경과 새로운 디자인이 쓰일 기능적 배경의 차이를 잘 살펴야 해. 그러고 나서 ‘환유’나 ‘은유’를 통해 기존의 낡은 프레임을 새로운 프레임으로 전환해야지. 이런 기법을 ‘디자인 콘셉트(concept) 잡기’라고 해. 디자인 콘셉트가 잡히면 자연스럽게 전경이 되는 기능을 어떻게 표현할지 판단할 수 있게 되지. 즉 언어 만들기가 ‘전체 의미에 접근하는 프레임을 잡아주는 것’이듯, 디자인하기는 ‘전체 기능에 접근하는 프레임 바꿔주기’라고 할 수 있지. 이게 바로 디자인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야.
--- p.33 「2 디자인이 하는 일」중에서
물론 여전히 디자이너의 주요 역할은 전경으로서의 언어 만들기, 즉 ‘표현’이야. 과거 디자이너는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예술가로 여겨지곤 했어. 덕분에 문제 해결이라는 책임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었지. 하지만 디자인이 본질적으로 문제 제기보다는 문제 해결에 전문화된 분야라는 점을 잊어선 안 돼. 디자이너가 산파나 교육자가 돼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까지 회피해왔던 디자이너의 본질적 역할을 상기시켜주는 것 같아. 예술가는 홀로 작품을 낳지만, 디자이너는 함께 노력해서 프로토타입을 만들지. 또 예술가는 작품을 완성하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하는 반면, 디자이너는 함께하는 사람들과 생각을 키워나가니까.
--- p.48 「3 디자이너의 역할과 책임」중에서
본래 한 사람 안에는 다양한 정체성이 공존해. 자신이 처한 맥락에 따라 각기 다른 정체성이 드러나지. 스스로 정체성을 선택할 수도 있고. 언어에는 한 집단의 생각과 정서, 나아가 문화까지 함축돼 있어. 그래서 특정 언어를 선택해 말하면 자신의 생각과 정서를 해당 집단에 동기화할 수 있지. 이런 점에서 집단 구분도 ‘민족’이라는 상상의 기준보다 ‘언어’라는 실체적 기준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 즉 언어야말로 한 개인의 다양한 정체성을 존중하는 세계화+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기준이 아닐까 싶어.
--- p.71 「5 왜 평어인가」중에서
디자이너가 디자인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선 해결하려는 대상이 ‘요소결합체’인지 ‘속성통합체’인지를 결정해야 해. 요소결합적 문제라면 먼저 문제를 새롭게 분해+조립할 필요가 있지. 새로운 분해를 통해 새로운 조합을 발견할 수 있어. 이 새로운 조합이 문제의 맥락을 변화시켜 문제를 해결하곤 하지. 반면 문제가 속성통합체라면 먼저 문제를 둘러싼 맥락을 찾아야 해. 맥락 변화에 따라 어떤 속성이 드러나는지 살펴야 하지. 이를 통해 부족한 속성은 채우고, 필요한 속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겠지. 요소결합적 디자인은 전경으로서의 섬세한 프레임(언어 개념)이 요구되고, 속성통합적 디자인은 배경으로서의 맥락적 확장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어.
--- p.100 「6 나는 디자인한다, 고로 존재한다」중에서
디자인(de+sign)은 개념을 언어로 만드는 행위야. 개념이 언어가 되어 다른 사람의 신경망과 연결되려면 형태적으로 체계화된 언어가 있어야 해. 일종의 약속된 언어망이지. 개념망이 개인적으로 구성한 개념과 범주가 언어로 환원되는 과정이라면, 언어망은 환원된 언어가 사회적으로 소통되는 체계라고 할 수 있어. 언어는 사회적으로 실재하는 개념과 범주라고 할 수 있지.
--- p.143 「9 소통하는 사람_언어망」중에서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감각 범주에서 벗어난 개념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야. 미술과 디자인에서 구성을 영어로 ‘콤퍼지션(composition)’이라고 해. 포지션(position) 개념을 계획해 범주를 모으는(com) 거지. 구성을 하려면 먼저 대상을 분해해야 해. 분해된 것을 분류하고 다시 조립하는 방식이지. 마치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과 글자처럼. 흥미롭게도 현대미술과 디자인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이를 조금 어려운 말로 해체와 콜라주(혹은 몽타주)라고 해. 과거 미술은 보이는 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방식으로 그렸다면, 현대미술(디자인)은 추상 요소를 활용해 욕망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지. 그림도 글과 같은 언어처럼 여겨진다고 할까. 지금 현대인은 이런 구성 능력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소통하면서 서로와 세계를 연결하고 있어.
--- p.168 「10 언어의 구조와 소통의 맥락」중에서
디자인 과정은 클라이언트만이 아니라 더 많은 전문가가 참여할수록 좋아. 되도록 다양한 신경망과 언어망을 연결해야 예측 가능성도 높아지고 문제 해결의 시행착오도 줄어들 테니까. 그래서 디자인은 그 자체로 협업적 소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야. 개념망의 근본 목적이 예측에 있듯이 언어는 다른 뇌, 즉 다른 사람과의 상호 소통을 통해 예측을 강화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어.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면 예측 가능성이 높아지지. (중략) 디자인 프로토타입은 대량생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잘못된 예측을 더욱 경계해야 해. 리스크가 크니까. 그래서 디자인은 여김(개념)과 느낌(범주)의 반복적 소통이 아주 중요해. 다양한 소통과 시행착오를 통해 최선의 여김과 최고의 느낌을 찾아야 하지.
--- p.184~185 「11 느낌과 여김」중에서
현대미술에 평론가가 많아진 건 미술에 추상 요소가 적극 활용되면서부터야. 미술평론가는 음악의 연주자라고 할 수 있어. 피아노 연주자가 쇼팽의 악보를 자유롭게 해석하듯이, 미술평론가는 작가의 작품을 자유롭게 해석하지. 음표가 추상적 기호이듯, 현대미술의 시각 요소가 추상적 기호이기에 일어난 현상이야. 나아가 추상 요소는 현대문명과 닮아 있어. 현대인은 누구나 무엇이든 될 수 있지. 누구나 무한한 욕망을 누릴 가능성을 갖고 있어. 주위를 한번 둘러봐. 옷과 도구, 건물, 도시 등 우리 시대 생활양식은 대부분 추상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무척 다양해. 어쩌면 현대에 추상 요소가 이토록 많이 활용되는 건 추상 요소가 우리 시대의 정신적 태도와 닮았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 그래서 나는 추상 요소가 현대를 대표하는 시각언어 요소라고 생각해.
--- p.213~214 「12 시각언어의 요소」중에서
중요한 것은 ‘자존감’과 ‘자신감’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랬듯 자존감을 가지세요. 데카르트가 말했듯 ‘디자인 되는 인간’에서 ‘디자인 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십시오.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입니다. 객관적인 ‘인간’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인이나 데카르트, 20세기 예술가와 언어학자보다 훨씬 더 좋은 여건을 갖고 있습니다. 디지털 정보혁명으로 모두의 지혜를 언제 어디서든 공유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이미 머릿속에 섬세한 ‘말차림=언어바탕’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말차림을 믿고 새로운 축의 시대를 이끌어가면 됩니다. 자신감을 갖고 ‘디자인design’ 하세요. 디자인을 통해 우리의 언어 바탕을 더욱 크고 참되게 키우길 바랍니다
--- p.286 「에필로그: 시각언어와 문명 디자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