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은 엉뚱한 사람을 잡은 거야, 로버트.” 루시엔이 마침내 말을 꺼냈다.
헌터는 잠시 말없이, 옛 친구를 다시 보았다. 루시엔은 드디어 긴장이 풀렸는지 이야기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헌터는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루시엔이 다시 감정이 치미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내가 했다고 하는 거 말이야. 넌 날 믿어야 해, 로버트. 나는 괴물이 아니야.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
헌터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누가 했는지는 알아.”
--- p.77
“일지가 한 권이 아닌가 봐요.” 테일러가 첫 번째 공책으로 손을 뻗으며 알렸다.
그녀는 헌터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그를 보지 않고, 그녀는 공책을 휙휙 넘기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글은 없고 직접 그린 그림과 스케치로 빼곡했다.
“로버트, 이리 와서 이것 좀 봐요.”
여전히 헌터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로버트, 내 말 듣고 있어요?” 테일러가 마침내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헌터는 방 한가운데서 미동도 없이 앞의 벽만 똑바로 응시하며 서 있었다. 어떤 감정 상태인지 읽어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로버트, 무슨 일이에요?”
정적.
그의 시선을 좇던 그녀의 눈이, 그림을 끼운 액자에서 멈췄다.
“잠깐.” 그녀는 눈을 찡그린 상태로 액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몇 초 만에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이해하자, 순식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세상에.” 그녀가 속삭였다. “저거…… 사람 피부예요?”
--- p.126
“퀴드 프로 쿼 Quid pro quo(‘받은 것에 대한 대가’라는 뜻의 라틴어?옮긴이).” 루시엔이 말했다. “경찰로서나 프로파일러로서, 또는 연방요원으로서 너희들은 항상 나 같은 사람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하지. 안 그래? 너희들은 항상 냉혹한 살인마의 정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내려고 해.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그렇게 경시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나 같은 괴물이 될 수 있을까?” 루시엔은 모든 단어를 흔들림 없는 단조로운 음성으로 전달했다. “글쎄, 한편으론 나 같은 괴물 역시 너희 같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고 싶어. 사회의 영웅들…… 최고 중의 최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사람들 말이야.” 그는 극적인 효과를 노리고 잠시 뜸을 들이는 것 같았다. “너희는 날 이해하고 싶어 하고, 나는 너희를 이해하고 싶어 하지. 지극히 간단한 문제야, 테일러 요원. 프로이트의 말처럼 누군가의 정신을 깊이 파고들고 싶고 현재의 그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가장 좋거든. 그렇지, 로버트?”
--- p.205
내 정신이 적응한 게 틀림없다. 살인은 이제 내게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진다. 밖에 있을 때 술집, 열차 안, 거리 등 어디에 있든 자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혹여 누군가에게 시선이라도 꽂힐 때면, 그를 얼마나 쉽게 죽일 수 있는지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얼마나 비명을 지르게 할 수 있을지, 얼마나 고통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을 하면, 전보다 더 흥분된다.
이런 생각들을 없애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없애고 싶지 않다. 이제는 살인이 아주 강력한 마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내가 해본 어느 마약보다도 강력한. 나는 완전히 중독되었다. 하지만 중독 상태에서도 나를 더, 완전히 돌아버리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 일종의 ‘방아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것도 방아쇠가 될 수 있다. 특정한 신체 유형, 말투나 시선, 옷 입는 방식, 체취, 행동, 버릇 등. 그 무엇도 방아쇠가 될 수 있지만, 내가 직접 보기 전까지는 몰랐었다.
어젯밤, 나는 다시 보았다.
--- p.283
테일러는 문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왼쪽으로 비틀었다. 철컥철컥 커다란 소리를 내며 잠금장치는 360도 돌아간 후, 다시 한 번을 더 돌았다.
손잡이가 돌아가고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테일러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경찰의 본능, 신체의 예민한 반응, 훈련과 경험, 심령 능력 등 이런 상황에서 발휘되는 게 무엇이든 간에, 마치 그 문의 열림이 수사관의 직관을 발동시키는 신호라도 된 것처럼 헌터와 테일러는 동시에 같은 것을 감지했다. 새로운 생명, 새로운 존재.
한 번 더 똑같은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을 가로질렀다.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을 수도 있어. 아직 희망이 있어.
하지만 그 희망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들이 감지했던 새로운 생명, 새로운 존재는 그들 앞에 있는 문 너머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 뒤에 있었다.
--- p.437
“글쎄. 그 미친 생각은 실제가 됐어, 로버트. 그리고 그 책 속 정보는 FBI, 국립 강력범죄분석센터, 그리고 BAU, 아니 전 세계 사법기관들의 잔혹한 연쇄살인 범죄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바꿔놓을 거야. 이제껏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들, 내가 하지 않았다면 이 세계는 절대 모를 부분까지 이해하게 해줄 테지. 한 번도 설명되지 않은 은밀한 행위와 생각들 말이야. 그런 범죄자들을 잡을 확률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일 수 있어. 그건 너와 이 엉망진창인 세상에 내가 주는 선물이야. 내 연구와 그 책들은 앞으로 대대로 분석되고 참고될 거야.”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연구 명목으로 목숨 몇 개 앗아 간들 무슨 상관이야? 지식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야, 로버트. 그리고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훨씬 비싸.”
--- p.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