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도 술을 따라놓고 마시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잔을 끝까지 비우는 데 아무런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나의 술친구들은 알고 있다. 술을 따르지도 않고 그냥 병째 놓고 굴비처럼 보기만 하는 것은 더더욱 좋아한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집에는 스카치, 버번, 진, 보드카, 캄파리, 피노 누아르, 보르도, 포 메로, 리즐링, 샤도네이, 그리고 IPA가 있지만 손님 없이 혼자 마셔본 적은 없다. 술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덜 마시게 되고, 사놓고 안 마시면 안 마실수록 술이 좋아진다. 이건 나의 오래된 술 좋아하는 방식이다. --- p.22
벌칙에 걸린 이의 의무는 이 노래의 리듬에 맞춰 빨리 술잔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쭈뼛거리다가 제때 못 마시면 여기 모인 이 귀한 사람들이 계속 어깨춤을 춰야만 합니다. 그러니 빨리 행동하십시오. 좋은 말할 때 원샷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테이블에 상기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이웃들이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힘들게 어깨춤을 추고 있는 상태로 두시겠습니까? --- p.53-54
잠깐 어디에 살았다는 경험, 누군가에게 주워들었을 뿐인 견해, 철저하게 주입된 취향. 고작 그런 것들로 나보다 조금 어린 사람의 하트 뿅뿅한 눈빛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처음에는 횡재처럼 느껴졌지만, 금방 죄책감과 지루함이 밀려왔다. 뭘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 싫었던 만큼 뭘 자꾸 가르치게 되는 것도 즐겁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점점 만나는 날이 신나지 않아졌고, 연락은 뜸해졌고, 78킬로미터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 p.96
갑자기 느려진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우리 사이가 다시 좋아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다. 나는 옆에 앉은 석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위스키 메뉴처럼 펼쳐놓고 고르고 있었다. 어떤 말을 해야 우리가 다시 좋아질 수 있을까. 우리가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장면에 웃을 때 나는 살 것 같다. 네가 내 얘기를 듣고 웃음을 터뜨릴 때 나는 살 것 같다. 이제는 세상이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단지 네가 날 보고 웃으면 그걸로 나는 살 것 같다. 그런데 네가 나를 보고 웃지 않으면 아마도 나는 죽을 것 같다. 그런 말들 중에 고르고 고르다 결국 말했다. “이 술잔 진짜 예쁘지 않아?" 석호는 그런 날 보며 말했다. “재미없게 넌 이 순간에 무슨 잔 얘기를 하니……” --- p.152
나는 잘 알고 있다. 너의 외로움도 내 외로움처럼 이름이 없다는 것을. 연애를 못 해서인지, 친구가 필요해서인지, 권리가 침해당해서인지, 존재가 지워져서인지.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외로움. 그런 외로움은 몰아낼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만 아는 적당한 이름을 붙여주고, 가까이에서 길들일 일이라는 것을. --- p.199
나는 이십대 내내 술자리와 연애 감정과 얼음땡을 하며 지냈다. 술로도 연애로도 인생이 딱히 휘 청거려본 적이 없고, 때로는 그게 콤플렉스이기도 했다.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콤플렉스. 새로운 술을 마셔보고 새로운 연애를 할수록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강해지는 콤플렉스. 항상 더 특별한 것, 더 제대로 된 것, 더 용기를 내야 하는 것들이 내 평범한 삶의 영역 경계 바로 밖에 보였고 그건 나를 늘 조마조마하게 했다. 다들 하는 것들을 왜 하지 않느냐고, 세상 모두가 나에게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냐며 신경질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 p.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