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뇌출혈이 벌어지고 있던 그 새벽의 침상과 그것을 가로막은 벽과 어수선했던 잠결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틀림없이 뭔가를 잘못했다는 끈질긴 자책감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러나 깜빡 졸 때는 체념과 함께 이상할 정도의 평화로움을 느꼈다. 어머니의 영혼이 내 옆에 앉아 오히려 이 아들을 위로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하고 광호는 생각해 보았다. 손녀의 로사리오 기도로 지금 붉은 장미 길을 걸어가고 계실지도 모를 어머니. 언젠가는 나도 그 길을 따라 기쁨에 겨워 날듯이 달려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자 광호는 불현듯 어머니의 유품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걱정 되었다. 그때, 광호는 자신이 지금 자고 있다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주위에 축축하게 드리워진 어둠이 자라서 유독 새까만 점으로 응어리지더니 까마귀 우는 소리를 내며 날아서 멀어져 갔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출상이었다. 더럭 겁이 난 광호는 온몸이 가늘게 떨려왔다. 겨울 새벽은 아침을 망각한 듯 언제까지나 캄캄하기만 했다.
광호는 그의 결곡한 성품을 친구로서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했지만, 동시에 그 성품의 기반이 되는 열등의식이 탄로날까봐 불안하기도 했다. 그것은 광호 자신의 경멸이 어느 쪽으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재능 있는 젊은이라면 자존심을 포장하기 위해 도덕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도덕은 오히려 기득권이 베푸는 시혜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저 사람 가진 건 없지만 정직하고 똑똑해. 법 없이도 살 놈이잖아? 즉, 머슴으로 부리기 좋다는 뜻이다. 그래도 그 덕에 세상에 틈입할 기회가 주어지는 게지. 이건 일종의 사회적 묵계 아닐까? 광호는 취한 친구를 지그시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묵계에서 빠져나오고 싶지만 그것이 잘 안 된다는 것을 아니까 우리는 이다지도 서먹서먹한 것일까?
“이 그지 같은 새끼야. 한번 사내답게 저질러 보든가. 그렇게 맨 날 장난질만 하지 말고!”
어느 날 술에 취해 빙그레 웃고 있는 아버지를 향해 광일은 그렇게 외쳤다. 그 말은 어떤 효과를 낸 걸까? 그 후 모든 것이 급속히 무너졌다. 암 투병에서 사망까지 일 년 남짓 걸렸다. 따스한 봄날 광호의 아버지는 완전히 말라버린 해골의 모습으로 세상을 떴다. 곧바로 형은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갔고, 어머니는 완전히 탈진한 평화를 은혜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광호는 어머니에게 깊은 연민과 함께 기이한 고독을 느꼈다. 이 고독은 증오와 인내가 뒤섞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얼핏 보면 위선처럼 보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위선과 같은 호사스런 정서는 그녀에게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굳이 묘사하자면 그것은 무기력이 승화될지도 모른다는 허망의 풍경이었다. 이렇게 이해하기로 마음을 정하자, 광호에게 삶이란 가족 모두가 각자 지리멸렬하며 보여준 기만, 배신, 부도덕으로 각인 되었다.
삶이란 처음에는 진정으로 소중한 꿈이었기 때문에 끝내는 아주 길고도 질긴 저주를 남길 수밖에 없는 일종의 각성인가 보다. 이 결론이 광호에게 생활의 구체적 가르침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때 품었던 이런 생각들이 광호 스스로에게도 막연했던 만큼 주변 사람들에게 그는 무척 수동적인 사람으로 비쳐졌던 것만은 틀림없다. 광호는 누구도 자기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고, 이 확신은 그가 인식한 삶을 상대로 점점 커져만 가던 혐오감에 도덕적 안정감을 부여했다. 그는 겉으로 매우 유약해보였지만 속으로 차츰 경직된 속껍질을 짓고 있었다. 즉, 고립이었다. 생에 대한 이 은밀한 기술은 사랑보다는 혐오에서 더욱 쉽게 강화되는 경향이 있었고, 언젠가는 파멸로 치달을 운명이었다. 느낌으로는 흐릿했지만, 이것이 진실이었다.
그날 밤도 광호는 어두운 꿈을 꾸었다.
바텐더 아가씨가 울고 있었다. 아버지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것이다. 광호는 그가 사지를 허공에 벌리고 등으로 미끄러져 떨어지는 모습을 거대한 현미경을 통해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그는 사실은 민아의 아버지인 김소장이었다. 그리고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는 곳은 빛이 가득한 투명한 집의 계단이었는데, 민아의 날카로운 울음이 칼날처럼 멀리서 투명한 얼음을 통해 울려왔다. 그 투명한 이중 저택은 아주 낡고 우아했다. 울음소리는 새떼로 바뀌었고, 새떼는 그 투명한 집을 선회하고 있었다. 광호는 그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집은 허허벌판이었다. 차가운 얼음 벌판이었고, 새파란 별들이 가득히 돋은, 언젠가 가보았던 그 별이었다. 눈을 들어 보니 거대한 조선 사람이 서있었다. 그의 거무튀튀한 저고리자락으로 하얀 눈물이 비스듬히 떨어졌다.
광호는 시퍼런 별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 팝송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별빛은 또렷또렷 점점 커졌고 투명하게 녹아내리는 액체처럼 보였다. 광호는 가볍게 뜬 몸으로 어둠을 가르고 날아올랐다. 온몸이 따스한 열기에 싸여 그는 광막한 우주 공간을 빛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두렵고도 자유로운 비행이었다. 불길이 치솟고 있는 태양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태양은 백광이 점점이 박힌 표면을 번쩍이며 느리게 자전하고 있었다. 그는 탐사 위성의 카메라 렌즈가 투명하게 녹아내리는 모습을 꿈인 듯이 몽롱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자신이 탐사 위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몸이 되어버린 위성은 왼쪽 다리가 불에 타고 있었다. 위성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인 채 태양을 향해 전속력으로 떨어졌다. 광호는 머리를 죽 빼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불덩이를 묵묵히 노려보았다. 이것은 어떤 결단의 순간이었다. 떨어지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막연히 그는 자기가 받아들이는 이 상황으로 하여 누군가를 대신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이제 완전히 타버린 그저 투명한 의식일 뿐이었으며 그것은 시각의 형태만을 부여 받은 이상한 존재였다. 시선은 불길 속을 헤치며 한없이 추락해갔다. 빨갛게 이글거리는 불길, 하얗게 회오리치는 불길, 주황빛으로 터져 오르는 불길, 불길의 가장자리를 타고 넘는 새파란 불길, 가도 가도 불바다며, 아래도 위도 불길뿐이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영원히 이곳에 갇혀야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서럽게 반추해보았다. 그는 출구를 찾아 불길 속을 날아다녔지만 불은 그를 가로 막아섰다. 그때 그는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지금 자기의 이 유폐로써 어머니를 구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붉은 꽃길이 열릴 수만 있다면…….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