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 거란과 후진은 점차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942년 6월 석경당이 사망하고 석경당의 조카 석중귀(石重貴)가 제위를 잇는다. 석중귀는 거란에 대해서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거란 태종은 후진을 공격할 생각을 한다. 후진을 정벌할 계획을 세운 거란 태종은 후방의 안정을 위해 고려와 우호 관계를 맺고자 했다. 왕건은 이 상황에서 관망하지 않고 참전을 택했다.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란에 대해서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조치를 한다.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켜버렸으니, 이는 매우 무도한 나라로서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을 수 없다.” 왕건은 이렇게 선언한 후, 거란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 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어두어 굶어 죽게 했다. 거란을 적대하겠다는 뜻을 만방에 선포한 것이다. 왕건의 의도는 명백했다. 거란과 전쟁을 통해서라도 옛 고구려 영토를 되찾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만부교 사건」중에서 중에서
서로 간의 대치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소손녕이 먼저 서희에게 말을 전한다. “우리나라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모두 차지하였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우리의 국경을 침범했기에 내가 와서 토벌한다. 그저 위협에 지나지 않는 말이라 서희는 따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서희가 반응이 없자, 소손녕은 다시 편지를 보냈다. “우리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는데도 너희가 아직 귀순하지 아니하니 소탕하기로 결정하였다. 지체하지 말고 빨리 항복하라!” 서희는 소손녕의 말을 접하고 이상함을 느꼈다. 더는 남하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구구절절 위협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희는 전반적인 정세에 대해서 생각했다. 거란과 송나라는 대치 중이었고, 거란이 아직 요동을 모두 평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압록강을 넘어 고려 땅까지 온 것이다. 서희는 드디어 판단을 내렸다. “거란군은 남하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서희는 다시 안북부로 돌아와서 서경에 있던 성종에게 즉시 편지를 보내 보고했다. “화친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소손녕의 위협과 서희의 판단」중에서 중에서
따라서 김치양과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자, 천추태후는 과감한 생각을 한다. 자신과 김치양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목종의 후계자로 삼아서 다음 왕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역성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난 생각이었으나 반드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천추태후는 섭정을 하고 있으니 사실상 왕이었고 김치양은 가장 강력한 권력자이다. 둘이 하려고 한다면 못 할 일은 없었다. 사실상의 역성혁명은 강력한 반발에 부딪힐 것이다. 그런데 반발을 현저하게 줄이는 길이 있다. 왕위에 오를 왕씨가 없다면 반발은 확연히 줄 것이다. 당시 태조 왕건의 피를 이어받은 왕씨 남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왕순 외에 왕림(王琳)과 왕정(王禎)이라는 태조 왕건의 손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왕림과 왕정의 아버지 동양군(東陽君)은 광종 때 반역죄로 처형된다. 따라서 이들은 역적의 자식이란 굴레를 쓰고 민간에 숨어 살았다. 그렇다면 목종 이후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왕씨는 단 한 명, 왕순뿐이었다. 천추태후는 이런 이유로 왕순을 꺼리기 시작한다.
---「출가」중에서 중에서
강조는 왕순을 맞아오게 한 다음, 목종에게 편지를 보냈다. “성상께서 병환이 위독하신데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였으니, 간악한 무리가 왕위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량원군을 대궐로 맞아들여 명분을 세우려고 합니다. 성상께서는 일단 궁궐 밖에 나가 계십시오. 곧 간악한 무리를 소탕한 뒤에 성상을 다시 모시겠습니다.” (…) 강조가 목종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다음 날에, 이현운이 이끄는 선발대가 드디어 개경 시내에 진입했다. 강조의 군사들이 궁궐까지 진입하자, 목종은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 목종과 천추태후는 같이 있었다. 둘은 화를 면하지 못할 줄 알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목종은 궁궐을 나가서 법왕사(法王寺)에 거처했다. 곧이어 대량원군 왕순이 궁궐에 도착하였고, 왕순은 드디어 연총전에서 즉위를 한다. 대량원군 왕순이 곧 현종(顯宗)이다. 강조는 목종을 폐하고 군사들을 시켜 목종과 천추태후의 측근들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유행간과 김치양 등 일곱 명을 처형했다.
---「현종의 즉위와 목종의 운명」중에서 중에서
고려의 방패인 서북면을 책임지는 사람은 서북면도순검사(都巡檢使) 양규였다. 양규는 안악군(황해도 안악군) 사람으로 자세한 인적 사항은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 조정에서 거란의 대규모 침공에 맞서 양규를 서북면도순검사로 임명했다는 것은 곧 그의 군사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 남아 있는 기록이 없기에 양규가 거느린 병력의 규모를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고려사』를 보고 추정해보면, 흥화진에 상시 주둔해 있는 병력은 행군이 2,000명 정도, 백정이 1,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흥화진이 최전선이었으므로 약간의 추가적인 병력증원이 있었을 것이다. 양규가 흥화진에서 거느린 병력을 4천~5천 명 정도로 추정하는 배경이다. 고려에서는 이번 거란군의 침공에 대비해서 세 가지 작전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거란군이 11월 초 압록강을 건너, 11월 16일 흥화진을 포위한다. 그러자 고려군은 첫 번째 작전을 실행했다. 바로 구주 내륙으로 우회하여 압록강을 도강하는 거란군의 측면을 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통군사 최사위가 이끌었다. 11월 17일, 통군사 최사위는 군사를 나누어 구주 북쪽의 세 길로 나가서 압록강을 도강하는 거란군을 공격했다. 때를 노린 기습이었고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전쟁은 그대로 끝났을 것이다.
---「무성(武成) 양규(楊規), 흥화진에 주둔하다」중에서 중에서
체구가 왜소한 늙은 관료가 항복을 주장하는 관료들 사이에서 현종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현종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했다. 이윽고 결심한 듯이 앞으로 나섰다. “신 강감찬,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63세 예부시랑 강감찬. 강감찬은 성종 2년(983년)에 장원급제를 해서 27년 동안 관직을 이어 오고 있었다. 강감찬은 ‘기묘한 꾀와 수단’으로 민간에 수많은 전설을 남긴 사람이었고 타고난 전략가로 알려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특출나게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그런 평범한 관료에 불과했다. 그러나 국가적 위기 상황이 찾아오자, 그의 강인함과 비범함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강감찬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의 일은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군세가 적어 적들을 상대할 수 없으니 일단 예봉을 피해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현종이 말했다. “시간을 번다고 거란군을 물리칠 수 있겠소?” 강감찬이 힘주어 말했다. “시간을 번 뒤에, 서서히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현종이 강감찬을 주의 깊게 보았다. 현종의 눈빛이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받은 강감찬이 다시 말했다. “남쪽으로 몽진을 떠나소서.”
---「서서히 이길 방법」중에서 중에서
구주성 안에 구주군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의 지휘자인 구주 별장 김숙흥이 군사들에게 명했다. “적이 곧 이곳에 당도할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섬멸한다!” 사람들의 긴 행렬이 산길을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회군을 시작한 거란군의 선봉부대였다. 그런데 이들은 고려의 성곽을 피해 북쪽의 산길을 이용해 도망치듯 빠져나가고 있었다. 좁은 도로에는 눈이 덮여 있어 행군하는 거란 군사들의 발목을 잡았다. 한반도 서북부 지역의 겨울 기온은 보통 영하 10도에서 영하 20도의 분포를 보이며 체감 온도는 영하 50도까지 내려간다. 추위와 더불어 굽이굽이 펼쳐진 산길은 거란군에게 또 다른 전투였다. 1월 17일, 구주 북쪽에 거란군 선봉대가 도착했다. 쉬지 않고 달려 온 이들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구주 북쪽 길은 경사가 매우 급하고 폭이 좁아서 내륙 지역 중에서도 가장 험한 지형으로 꼽힌다. 거란군은 좁은 길을 따라 일렬종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제한된 단일 기동로를 이용함으로써 행군 대형이길어지고 방향 전환도 쉽지 않았다. 기습당하기 가장 좋은 상황인 것이다. 그때 화살과 돌이 거란군의 머리 위로 덮쳤다. “적들을 도륙하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이들은 구주별장 김숙흥과 중랑장 보량이 이끄는 구주군이었다.
---「구주 협곡 전투와 무로대 기습」중에서
야율세량과의 전쟁에서 수만 명의 고려군이 목숨을 잃었다. 병력의 충원이 절실했다. 현종은 죄수들을 석방하여 결원을 보충하고자 했다. “전국의 모든 죄수 가운데 도형(徒刑)과 유배형 이하의 범죄자는 보증을 받고 석방시킬 것이며, 재판 절차를 신속히 시행하도록 하라.” 이때 강감찬은 이부상서에 임명되어 있었다. 이부는 상서6부 중에 으뜸인 기관으로 관리들의 인사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던 관서였다. 강감찬이 현종에게 말했다. “신의 토지 12결을 군사들에게 주기를 원하나이다.” 강감찬은 솔선수범하여 자신의 재산을 군사들에게 주어 사기를 높이려고 했다. 그리고 서북면에 철주성(鐵州城)을 쌓는다. 철주성은 지금의 서림성
으로 추정되며 그 위치가 다른 성곽과는 조금 달랐다. 흥화진, 구주, 통주, 곽주 등의 성곽들은 모두 산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철주성은 일반적인 산성이 아니었다. 주도로에 위에 쌓아 완전히 길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다시 전쟁을 대비하다」중에서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고려군과 거란군 모두 가뿐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전투는 사람의 체력을 극한까지 소모시키는 행위였다. 그야말로 백중세, 팽팽한 접전이었으나 바람의 방향에서 유리한 거란군이 공세적인 입장이었고 고려군이 수세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려군 대부분은 가족이나 친구들을 거란군에 잃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쉽게 무너질 수 없었고 무너지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두 번의 회전과는 다르게 거란군과 호각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때였다. 깃발들이 순간 북쪽으로 나부끼기 시작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갑자기 남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더불어 비구름이 남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구름 아래, 하나의 깃발이 있었다. 구름은 마치 그 깃발끝에 걸려서 오고 있는 듯 보였다. 깃발을 필두로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군사들. 개경을 호위하러 갔던 김종현과 1만 정예군이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비바람과 더불어 구주 전장에 진입하고 있었다. 이때 강감찬과 고려 군사들의 눈에는, 마치 김종현과 그의 군대가 비바람을 몰고 오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바람을 몰고 온 남자」중에서
팽팽했던 승부의 추는 이제 고려 쪽으로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드디어 거란군 진영이 무너졌고 거란 군사들이 무질서한 패주를 하기 시작했다. 소배압은 명령을 내려 상황을 수습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패신의 광풍이 거란군을 휩쓸고 있었다. 소배압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배압은 갑옷과 병장기를 모두 버렸다. 갑옷은 패주하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거란군 총사령관 소배압은 전장을 떠났다. 거란군들은 무작정 북쪽으로 내달렸다. 고려군들은 그런 거란군을 추격하며 주살했다. 거란이 패주하면서 버리고 간 무기와 갑옷들로 다니는 길이 막힐 지경이었으나 고려군들은 악착같이 거란군을 뒤쫓았다. 거란군 10만은 이 전투에서 대개 죽거나 사로잡혔다. 거란으로 무사히 돌아간 인원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거란군이 이토록 참혹하게 패배한 것은 거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려 입장에서는 이때까지의 패배를 모두 설욕하고도 남는 대승리였다.
---「총공격」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