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은 1930년대 중반에 쓴 장편 『성모』에서 지금으로선 꽤 낯선 교실의 풍경을 그려낸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철진이가 엄마에게 자기네 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아예 지리부도까지 펴놓고 침을 튀기는 것이었다.
“엄마? 우리 반에 글쎄 여기 이 제주도서 온 아이두 있구 또 나허구 같이 앉었는 아인 함경북도 온성서 온 아이야. 뭐 경상남도 진주, 마산, 부산서도 오구 평안북도 신의주, 그리구 저 강계서 온 아이두 있는데 걘 글쎄 자동차루, 이틀이나 나와서 차를 탄대…. 퍽 멀지, 엄마?”
지도를 거침없이 짚어가는 그 손가락이 퍽 부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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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엄밀한 의미에서는 ‘동경’이라는 기표─는 싫든 좋든 우리 근대 문학의 자궁 같은 곳이었다. 사실 우리의 근대는 수신사를 파견하던 시절 이후 도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근대 문학사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거의 대부분의 주요 작가들 역시 도쿄를 통해 어떤 형태로든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된다. 가령 최남선이 처음 가서 보고 기겁한 도쿄는 서울에서 말 그대로 대롱으로만 보던 것하고는 전혀 딴판 세상이었다. … 아직 학생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 이광수 역시 『소년』과 그에 이은 『청춘』의 주요 필진이었다. 두 사람은 도쿄에서 처음 맺은 인연을 한 40년 좋이 이어간다. 그 인연의 절정 또한 도쿄를 빼고 말할 수 없다. 1944년 그들이 새삼 도쿄까지 건너가 나눈 대담의 기록이 실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조선을 대표하는 두 지성인은 도쿄에서 공부하는 조선의 청년 학도들을 향해 “조선이란 점에 너무 집착하는 모습”을 벗어나 “대동아의 중심이자 중심인물이 된다는 기백”을 지닐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같은 지면에서 그들은 처음 도쿄에 와 문학에 눈을 뜨던 시절부터 새삼 회상을 이어나가는 가운데, 몇십 년을 ‘국어(일본어)’로 글을 써오긴 했으나 ‘외국인’으로서 흉내 내기가 가능할지 근본적으로 의문이라는 속내 또한 솔직히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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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단은 다시 두만강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갔다. 경흥, 온성, 회령, 무산을 거쳐 백두산을 향하는 여정에서 무수한 마을을 지났다. 가린의 기록 속에서 그것은 탐사가 아니라 마치 어떤 꿈속이나 황홀경을 걷는 것 같았다. 갈수록 산은 높아지고 산마루에는 보랏빛 광채를 발하는 양탄자 같은 구름이 걸렸다. 그늘진 골짜기에는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정적을 깨는 것은 이따금 들려오는 황소의 긴 영각(울음소리)뿐이었다. 가린은 그런 풍경들이 수천 년 전의 신비로운 심연 속으로 저와 일행을 끌어당긴다고 생각했다. 아마 10년 만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 일행을 잡아당기던 세이렌의 유혹을 연상했을지도 모른다. 두만강변과 백두산 일대의 경치 또한 장관이었다. 가린은 시베리아와 우랄알타이, 카프카스 등지에서 아름다운 원시림을 두루 체험했지만 조선의 그것처럼 놀랍도록 아름다운 숲을 본 적은 없었다고 몇 번이고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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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피장」 편에는 꺽정이가 스님이 된 스승 갖바치를 찾아 묘향산에 갔다가 둘이 함께 백두산 구경을 떠나는 대목이 나온다. 두 사람은 희천, 강계를 지나 후창으로 나와서 압록강을 끼고 올라오며 갈파지, 혜산진을 거쳐서 백두산 지경에 이른다. 길을 나선 지 달포가 지난 무렵이었다. 그동안에도 오막살이 한 채 없는 곳을 숱하게 지나왔지만 이번에는 도끼 소리 한 번 들어본 적 없을 나무들이 하늘을 가린 숲속에 들어섰다. 앞뒤를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가고 가고 쉬지 않고 가도 나무뿐이었다. 만일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된다면 10년, 20년에도 벗어나기가 어려울 성싶었다. 그 캄캄한 밀림에서 그들은 짐승처럼 살아가는 운총이와 천왕동이 남매를 만난다.
--- p.49
그곳 역시 북국이었다. 동짓달부터 이듬해 2~3월까지 1년의 3분의 1은 눈에 파묻혔다. 그곳의 눈이란 대개는 동짓달 초승 밤새껏 처마 끝에 애끓는 듯한 낙숫물을 지으면서 시름없이 내리던 비가 갑자기 눈송이로 변하여 퍽퍽퍽 땅에 박히면서 시작되게 마련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오래 기다리던 나그네 모양으로 그것을 반겼다. 아직 덜 큰 처녀애들은 작은 손뼉을 마주치며 뜨락으로 뛰어나가서는 치마폭을 버리면서 눈송이들을 받았다. 새로 해준 때때치마를 적셨다고 어머니의 주먹을 등덜미에 몇 개씩 받아도 마냥 흥겨울 뿐, 애기씨 배기씨들은 다시 찾아온 눈의 나그네를 결코 원망하지 않았다.
--- p.120
1926년 7월 28일 『동아일보』는 제1면에 육당 최남선의 기행문 「백두산 근참기」를 커다랗게 싣는다. ‘근참覲參’이라는 말 자체에 삼가고 우러르는 마음이 잔뜩 배어 있다. 7월 25일 아침 경원선 고산역에서 써 보낸 이 글은 무려 총 89회에 걸친 연재 후에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가장 빼어난 기행문 중 하나로 꼽히게 될 터였다.
--- p.131
한설야의 「과도기」(1929)는 흥남질소비료공장이 처음 들어서던 때의 일을 그린다. 주인공 창선이네는 고향에서 살 수가 없어서 간도로 떠나갔지만 거기서도 ‘되놈’들의 등쌀에 시달림만 받고 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새 고향은 상전벽해였다. 마을은 통째로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낯선 공장들이 들어섰다. 형님네도 구룡리로 이주해갔다. 집값을 보상받았다지만 생계 수단 자체가 사라진 터에 그것으로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당장 포구가 사라져서 고기잡이를 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농사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들은 대대로 손에 익은 일은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 p.162
작가 이효석은 아까부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밤, 올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있다손 치더라도 그처럼 눈 많은 밤에야 쉬이 나타날 재간도 없을 터였다. 제19사단의 정문은 봉쇄되었고, 묵 내기 화투를 하던 젊은 치들의 발길도 진작 끊겨버렸다. 오직 막차를 기다리는 이효석만이 있을 뿐인데, 정작 그는 막차가 늦게 떠나기만을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실, 그는 ‘동’이라는 이름의 카페에서 보내는 모든 순간들이 행복했다.
눈 나리는 고요한 밤.
북국의 눈송이는 유달리 굵다. 그리고 밤의 눈이란 깊은 푸른빛을 띤다.
--- p.244
백석은 함경도의 산들을 좋아했다. 가까이는 고찰 귀주사가 있는 함흥의 설봉산을 좋아했고, 멀리는 매일같이 학교를 오갈 때 지붕처럼 혹은 모자처럼 늘 제 이마 위로 걸리는 장진의 높은 산들도 좋아했다. 고향 정주를 떠올리게 해서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산중음」(1938) 연작을 쓰면서는 고향 평안도 땅을 한층 더 그리워했다. 사실 장진에서는 평안도 땅이 지척이었다. 그래도 관서(서북) 지방과는 또 다른 관북 혹은 북관의 풍정이 그의 시심을 꽤 흔들었다.
--- p.259
이효석은 주을에서 양코프스키를 직접 만난 적도 있었다. 그때도 그는 여름 한철 하얼빈이나 상하이에서 모여드는 피서객을 목표로 일종의 객주업을 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노비나가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젖소를 길러 우유를 짜고, 꿀벌을 쳐서 봉밀을 얻고, 과수와 채소를 심어 식탁에 올렸다. 그뿐인가, 여름에 쓸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가 있었고, 수십 마리 사슴을 키워 녹용을 얻었다. 겨울에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사냥을 해서 고기는 물론 가죽도 얻었다.
--- p.289
이용악의 북방 또한 이국 취미하고는 크게 관계가 없다. 당대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기 때문이다. 정든 고향을 등지고 남부여대 먼 길을 떠나온 이민자들은 혹은 걸어서 혹은 트럭을 타고 혹은 또 기차를 타고 진작 사라진 나라의 국경선을 건넌다. 그리하여 두만강 앞에 섰을 때, 누구 하나 죄인이 아닌 자 없었다. 모두 코끼리처럼 말이 없었다. 강 건너 바람은 이리처럼 날뛰어 그들의 가슴은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일제 강점기를 되새길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이용악의 명편 또한 이렇듯 쓰린 역사 속에서 탄생한다.
--- p.314
최인훈의 『두만강』은 독자들을 당혹시킨다. 소설에서는 한동철과 그 가족, 그리고 한동철의 형과 사귀는 연인 현경선과 그 가족이 서사를 이끌어간다. 그들 중 상당수는 훗날 너무나 당연시된 민족주의라는 그물만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다. 다시 말해 1943년 그들의 정체성은 이미 조선인이 아니라 ‘우리 일본’, ‘우리 일본군’, ‘우리 일본 사람’이었다. 천황의 이름을 말할 때 자세를 바로잡는 것은 그들이 새로운 DNA를 꽤나 깊이 형성해가던 중이라는 하나의 증거였다.
--- p.341
누군가 우리의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다고 했다.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 말을 다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사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해방의 그날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마저 기꺼이 내바쳤던가를 생각하면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해방 직후의 얼마간은 모든 게 어수선했고 강퍅했고 어떤 면에서는 씁쓸했다. 그것만은 사실이리라. 하지만 그때, 청진 역전의 국밥집 할머니가 일본인 피난민들에게 말아주던 그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 있어서 우리의 해방은 참으로 의연한 어떤 것일 수 있었다. 비록 화려한 횃불은 아니더라도 할머니의 국밥집에 까물거리던 잔등, 그 희미한 불빛은 해방이 그저 족쇄로부터 풀려남을 넘어서 어째서 인간 존엄의 그것이어야 하는지를 훌륭하게 웅변한다.
--- p.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