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륵, 후르르륵.
단우는 식탁에서 라면을 먹으며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습니다.“응응, 그래. 내일 학교에서 봐!”입안 한가득 라면을 넣은 얼굴이 즐거워 보입니다.“단우야, 천천히 먹어.”할아버지가 미소를 담은 얼굴로 말합니다. 이마에 땀이 맺힌 단우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두 팔을 쭉 뻗었습니다.“아, 배부르다. 라면은 언제나 먹어도 안 질린다니까! 누구랑 그렇게 통화를 오래 하니? 우리 반 솔미요. 제 여자 친구! 여자 친구?”단우의 대답에 할아버지가 허허 웃었습니다. 할머니가 옆에서 거들었습니다.“우리 손주 여자 친구 있대요. 첫사랑이래요.”할아버지가 두 손으로 단우의 어깨를 토닥였습니다.“우리 단우, 참 좋겠구나.”엄마가 코트를 걸치며 말했습니다.“아버님, 이제 슬슬 나갈 준비하셔야죠. 단우도 라면 다 먹었으면 서둘러라.”잠시 뒤 단우네 가족은 집을 나섰습니다. 말쑥한 양복 차림의 아빠가 승용차 운전대를 잡았지요. 엄마가 조수석에 앉고 단우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뒤에 앉았습니다. 승용차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큰 길로 접했습니다. 가을이 짙어가는 거리에 낙엽이 가볍게 흩날렸습니다. 할아버지가 단우의 손을 잡으며 물었습니다.
--- 「들어가며」 중에서
전쟁의 폐허가 가시지 않은 1950년대의 어느 날입니다. 아침부터 용진이는 마음이 울적했습니다. 아버지의 병세가 심해졌기 때문이지요. 아버지는 어제도 밤새도록 앓는 소리를 냈습니다. 툇마루에 앉아 엄마, 누나와 셋이서 아침으로 보리죽을 먹었습니다. 작은 공기에 담긴 보리죽은 몇 번 숟가락질을 하니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용진이는 안방을 향해 인사를 했습니다.“아버지, 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쉿!”엄마가 용진이를 보며 입에 손가락을 댔습니다.“얼른 가, 아빠 간밤에 한숨도 못 주무셨어. 이제 좀 주무셔야 해.” 용진이는 고무신을 고쳐 신고 학교로 향했습니다. 두 살 터울의 누나가 얼른 도시락을 책보자기 속에 넣었습니다. .멀건 보리죽만 먹어서 그런지 힘이 없습니다. 길가의 돌부리가 자꾸 발에 걸립니다. 수업 종이 울렸습니다. 아이들은 재잘거리던 소리를 멈췄지요. 선생님이 교과서를 펼쳤지만 새로 짝꿍이 된 여자아이는 내내 엎드려 있었습니다.‘어휴, 얘는 정말 나무늘보 같아!’용진이는 속으로 투덜거렸습니다. 5학년이 되자 새로 정해진 짝꿍은 키 작고 가냘픈 몸집의 여자아이입니다. 둥그런 큰 눈에 늘 말이 없었지요. 워낙 조용해 용진이는 가끔씩 이름을 잊을 때도 있었습니다.‘맞아, 얘 이름이 재희라고 했지.’재희는 학교에 오면 자주 엎드려 자곤 했습니다.“박재희, 잠은 집에서 자야지.”선생님은 늘 핀잔만 주고 별말이 없습니다. 농사일을 돕느라 피곤해 하는 아이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땡, 땡, 땡!
--- 「할아버지의 첫 사랑」 중에서
누구 재희 집 아는 애 없니?”아무도 손을 드는 아이가 없었지요.“안되겠다. 오늘은 재희 집에 가봐야겠다. 용진아, 네가 짝꿍이니 선생님이랑 같이 가자.”용진이는 선생님과 함께 재희네 집을 찾아 나섰습니다. 주소를 물어가며 한참을 걸었습니다. 산등성이 달동네에 어깨를 맞댄 납작한 판자집들이 보였지요. 재희네 집은 귀퉁이의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집이었습니다.‘어? 재희네도 우리 집처럼 못 살았구나.’용진이는 눈가를 찡그렸습니다. 집 앞에는 몇몇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어휴, 힘 들어라. 여기가 재희네 집 맞나 본데 웬 사람들이 몰려있지?”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문 안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용진이와 선생님은 놀란 눈으로 마주 보았습니다. 어른들이 침통한 얼굴로 거적때기로 덮은 들것을 들고 나왔습니다.“아이고, 재희야! 안 된다. 못 간다, 우리 재희야!”엄마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울면서 뒤따랐습니다.‘재희?’거적때기 밖으로 축 늘어진 아이의 손이 보였습니다. 손톱에는 봉숭아 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용진이는 순간, 까마득한 현기증을 느꼈습니다.“어린애가 며칠을 굶었다지? 영양실조에 폐렴까지 걸렸으니….”“돈 벌러 서울 갔다는 애 아빠는 소식도 없고 먹을 게 없어서 엄마가 구걸까지 했대요. 쯧쯧.”“얼마 전에도 박씨네 아들이 영양실조로 죽었는데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네요.”동네 사람들이 숙덕거렸습니다. 젖먹이를 들쳐 업은 재희 엄마는 다리를 저는 것 같았습니다.“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선생님은 놀란 얼굴로 달려갔습니다. 용진이는 한 가닥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 「재희의 결석」 중에서
용진이는 어려운 형편이지만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백점 시험지를 받아오면 아버지 어머니가 뛸 듯이 몹시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사람은 모름지기 배워야 한다. 공부를 잘해야 언젠가 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 미래는 똑똑한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날이올 거야.”아버지는 막연한 믿음으로 입버릇처럼 말했지요. 마을 사람들도 소를 팔고 땅을 파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자식은 공부시키려고 애썼습니다. 용진이는 면사무소 계장으로 있는 큰 아버지 댁의 도움으로 중학교까지 마쳤지만, 돈이 없어서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읍내에 나갔을 때 어쩌다 마주치는 교복 차림의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은 허드렛 일꾼으로 일하거나, 덩치가 큰아이들은 기차역에서 리어카를 끌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가출을 해서 나쁜 친구들과 휩쓸리기도 했지요. 용진이도 농사일을 거들기도 하고 나무를 해 장터에 내다 팔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무리 소처럼 일해도 여전히 세끼 밥 제대로 먹기 힘들었습니다. 초승달이 희미하게 보이는 가을밤이었습니다. 용진이는 친구 효돌이와 함께 뒷산 중턱에 앉아 밤을 따다 구워 먹었습니다. 효돌이가 용진이의 눈치를 보며 말했습니다.
--- 「절망속의 한줄기 빛」 중에서
대통령의 말에 아버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대통령은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여기 이렇게 발전하는 농촌을 보니 참 기분이 좋습니다. 저도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 출신이라서 어릴 때 잘 못 먹고 자랐습니다.”대통령은 잠시 눈을 감더니 목이 메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보듬어야 할 많은 분들을 챙겨 드리지 못해서 대통령으로서 많이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생하지만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까지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가난만은 우리 후손들에게는 물려주지 맙시다. 다 함께 힘냅시다.”사람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습니다. 대통령은 산을 내려가기 전에 용진이를 흘끗 보더니 물었습니다.“학생인가? 아, 아닙니다. 각하, 중학교를 마치고 농사일을 돕고 있습니다.”
--- 「우리도 잘살 수 있다」 중에서
연둣빛 보릿대가 누르스름해질 무렵이었다. 순덕이네 집 식구들은 커다란 양푼에 밥을 퍼서 상 위에 놓고 둘러앉아 눈치껏 먹었다. 순동이는 두 숟가락도 더 될 만큼의 밥을 한 숟가락에 듬뿍 떴다.“혼자만 많이 먹으려고 그러지?”순덕이가 앙칼지게 불평하자 순동이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너도 먹어. 누가 못 먹게 하나?”서로 밥을 더 먹겠다고 욕심을 부리던 남매는 드디어 숟가락을 휘두르며 싸우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소리를 꽥 지르며 양푼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밥에 금을 쫙쫙 그었다.“순덕인 여기, 순동인 이쪽. 남의 것 건드리지 말고 먹어. 알았어?”
“대통령이 제주도는 감귤을 소득증대 작물로 정하고 정부에서적극 지원하겠다고 했다는 구먼. 그게 우리랑 뭔 상관이유?”어머니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아버지는 원래 조금씩 감귤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앞 다투어 감귤나무를 더 심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우리도 감귤 농사나 해볼까?”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머니도 할머니도 반대했다.“묘목을 심고 몇 년 키워야 열매가 열릴 텐데 그동안 뭘 먹고 사냐. 돈은 있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돈이 없었다. 무슨 돈으로 묘목을 사나. 아버지는 더 이상 우기지도 못했다. 순덕이네는 아직도 식구들이 일 년 동안 먹을 식량으로 조와 보리농사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돈이 될 게 없었다. 쌍둥이가 숟가락 싸움할 정도로 가난한 삶이었다.
초가집은 시범적으로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다. 비만 오면 흙탕길이 되는 길도 말끔히 포장했다. 순덕 아버지는 한껏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사람들이 순덕 아버지를 필두로 새마을 운동 바람에 신이 나게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하는 즐거움을 어디다 비하랴. 일하자 올해는 일하는 해다. 아버지는 이 노래를 시도 때도 없이 흥얼거렸다. 정부에서 내건 구호는 해마다 달라졌다.
--- 「숟가락 싸움」 중에서
제삿날이었다. 언니와 순덕이는 라디오에서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뉴스가 나왔다.“무장공비가 북한에서 침투했습니다.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청와대로 향하던 중이었고 검문하던 경찰관이 공비가 쏜 총에 맞아 숨지고….”순덕이는 가슴이 콩콩 뛰어서 하던 일을 멈추었다. 뉴스는 계속 이어졌다. 무장공비들은 31명 중 1명은 생포되었고 29명은 사살되었으며 나머지 한 명은 북으로 도주를 했다고 아나운서는 흥분된 목소리로 전달했다. 순덕이네 식구들은 제사 음식을 만들며 계속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친척들도 제사가 끝날 때까지 온통무장공비 얘기뿐이었다. 생포된 공비 이름이 김신조라고 하고 이들은 대통령 암살뿐 아니고 국방부를 침투하거나 정부의 중요한 인물들을 암살하는 등의 임무를 띠고 내려왔다는 거다.
--- 「수상하다 수상해」 중에서
재영의 할아버지가 한마디 하자 사람들은 웅성거리다가 슬슬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왜냐면 아주 오래된 나무에는 신령한 기운이 있어서 손댄 사람이 화를 당한다는 미신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톱을 들고 나서야 하는 데 아무도 하지 않겠다니 순덕 아버지는 책임자로서 난감했다. 어머니와 할머니도 절대손대지 말라고 반대를 하자 더욱 곤혹스러웠다. 아버지는 속으로 고민하다 보니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눈을 말똥거리다가 밖으로나왔다. 달빛이 대낮처럼 환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식구들 몰래 일을 저질러 버리자. 그래. 명색이 새마을 지도자인 나도 안 하는데 누가 하겠어. 요즘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무슨 나무가 해꼬지를 해? 나무는 나무일 뿐이지.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헛간에서 톱을 들고 나왔다. 살금살금 마당을 나왔다. 달빛은 은빛 거미줄처럼 하늘에서 내려와 거대한 몸집의 팽나무를 감쌌다. 팽나무는 태산같이 고요히 서 있었다. 나무껍질은 코끼리 피부같고, 줄기는 코끼리 몸통같이 거대한 팽나무에 톱을 대자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오싹 소름이 돋아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 「팽나무 귀신」 중에서
“세상 별일도 다 있네.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 낸다는 데 그게 될까?”“에구. 되긴 뭘 돼? 불도저 앞에 드러누울 정도로 반대를 한다는구먼.”“아니, 자동차도 많지 않은데 길만 뚫으면 뭐 하냐고. 미친 짓이지.”팽나무 밑에 모여선 사람들이 저마다 주워들은 소리를 한마디씩 했다. 아버지 역시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를 식구들에게 전했다.“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를 만들겠다. 결심한 건 독일에 갔을 때 였다고 하네. 독일이 엄청나게 발전한 걸 보고 깜짝 놀랐다는 거야. 전쟁의 폐허에서 어떻게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독일수상이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아우토반이라는 고속도로를 보여주었다는구먼. 그때 대통령은 충격을 받아서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결심을 한 거래.”
--- 「대동맥」 중에서
동네에는 집집마다 소가 있었다. 순덕이네 집에도 재산목록 제1호인 소가 한 마리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마을에 소 대신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말이 더 힘이 세고 일을 잘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소를 팔아 싼값에 말을 샀는데 몸집은 작지 않았으나 볼품없는 말이었다.“난 우리 말을 로시난테라 부를 거야.”순동이가 말의 이름을 짓자 어머니가 궁금해서 물었다.“로시난테? 그게 무슨 뜻이냐? 동키호테라는 엉터리 기사가 타던 말이에요.”순덕이는 눈만 껌뻑이는 어머니에게 동키호테와 로시난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드렸다. 동키호테는 담임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였다.
--- 「달려라 로시난테」 중에서
“우와! 우리 기술로 자동차도 만들고 유조선같이 큰 배도 만드는 거 너무 놀랍지 않아? 대단하다. 대단해.”뉴스를 보다가 변성기에 들어선 순동이가 제법 걸걸해진 목소리로 탄성을 질렀다. 아버지도 감탄하면서 한마디 했다.“대단하고 말고. 다른 나라에서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는구나.”텔레비전 뉴스에서는 한 달이 멀다 하고 큰 공장 준공식의 테이프를 끊는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식구들은 나날이 발전하는 나라의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순동이는 더 그랬다.“기적은 기적이야. 포항에는 제철소가 들어섰지, 울산에는 조선소가 세워졌지, 자동차며 철강, 정유, 반도체, 전자제품, 여러 가지 기계를 만들어내는 공장까지 들어섰으니까 정말 굉장하지? 나도 이다음에 저런 데 가서 일할 거야. 나는 기계를 다루는 게 좋거든.”
--- 「5개년 계획을 세워야겠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