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일까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애국이나 ‘국뽕’과는 인연이 없다. ‘미국의 생명운동’, ‘개신교의 생명운동’, ‘가톨릭의 생명운동’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생명운동은 40여 년 전 원주에서 시작된, 기존의 ‘반체제운동’과 구별되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흐름은 〈한살림〉 등의 생명협동운동으로 자리를 잡고, 삼보일배와 생명평화 탁발순례, 오체투지 등으로 이어지는 생명평화운동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생명운동은 거의 낙태반대 생명운동이요, 자살방지 생명운동이다. 심지어는 동성애반대 생명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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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생명운동에서 ‘전환’은 무엇보다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다. 계급과 민족과 인간의 지평을 넘어 ‘생명’의 지평을 바라본다. 전환은 ‘방향바꾸기(turn)’이기도 하고, ‘변형(transform)’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차원변화’이다.
--- p.16
생명은 움직인다. 감응(感應)한다. 감동(感動)하고 감상(感想)한다. 생명활동이란 무엇보다 응답능력16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응답능력은 보통 ‘책임’이라고 번역되는 영어 responsibility(response+ability)에서 온 말이다. 감응하는 힘, 때와 장소에 맞게 감동하고 감상하는 힘이 응답능력인 셈이다. 인간과 사회의 경우 아마도 ‘느끼어 생각함’의 능력이 중요할 것이다. 그렇다.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생명운동은 응답하고 있는가?
--- p.26
이름하여 ‘대전환’ 시대, ‘나’의 몸에서 새로운 사상이 태동하고 있다. 또 다른 느낌이 엄습하고 한 생각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느낌-생각의 작업자가 된다. 우리는 모두 현장(現場)의 사상가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 중 한 사람으로서 30년 생명운동의 경험을 중심으로 40년 한국의 생명운동의 다시 보고 다시 쓰고자 한다. 이를테면 또 다른 ‘생각/느낌’ 25의 지도 그리기이다. 다시 말하면, 또 다른 생명운동을 위한 ‘세계감’ 알아 차리기와 ‘세계관’ 설정, 그리고 ‘세계상’ 그리기이다. 생명담론의 재발명이다. 생명사상, 생명운동 다시쓰기이다.
--- p.31
이제 생명운동은 이미 보통명사가 되었다. 국어사전에서 생명운동은 일차적으로 “생명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여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사회적 운동”이다. 하지만, 생명운동은 ‘생명운동들’이다. 생명운동은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지만, 동시에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고 분화되었고, 또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생명운동은 다양한 ‘생명운동들’의 통칭이다. 예컨대, 생명살림운동, 생명평화운동, 생명공동체운동, 생명문화운동 등이 그것이다.
--- p.40
1990년대와 2010년대 생명운동은 성장과 확산을 거듭했다. 사회적 확산과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이를테면, 절정기였다. 2010년대 들어서면서 ‘생명평화’ 가치는 노동, 군사기지 문제 등 첨예한 사회적 이슈들과 연결되면서 더욱 넓어졌다. 그리고, 기존의 시민단체, 관변단체와 연결되면서 국민운동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생명운동 고유의 에너지는 약화되고, 담대하고 심오한 생명담론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생명운동은 바야흐로 봄여름을 거쳐, 가을과 겨울을 지나 새로운 사이클로 접어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p.70
그러나, 생명운동은 저항에 머물지 않는다. 생명운동은 ‘살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다.
--- p.82
생명 사건은 항상 역설적 사건이다. 살기 위해서는 경계(차이)를 만들어야 하지만, 경계(차이)가 고착되면 생명은 지속될 수 없다. 체계이론에 따르면, 생명체와 그 환경은 폐쇄적이면서 동시에 개방되어 있다. 폐쇄/개방의 역설이 생명체의 자기생산을 가능케 한다.
--- p.158
35년 전 「한살림선언」은 ‘전일적 생명의 세계관’으로 ‘시대의 허기(虛氣)’에 응답하고자 했다. 오늘 생명사상은 무엇으로 응답할 수 있을까? 응답은 세계관 재-설정(re-configuration), 생명사상 다시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펜데믹-기후변화와 대전환 시대의 오늘, 우리의 설정은 ‘몸-생/명의 세계관’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진리의 선포라기보다 차라리 ‘윤리적 결단’이다. 몸의 감각과 체험에 기반한 진실의 몸짓이다. (돌아보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그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몸-생/명’의 세계관에 기반한 깊고도 담대한 염원과 열망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반드시 몸-마음의 실험이 뒤따라야 한다.
--- p.167-168
다시, 묻는다. 왜 환경이나 녹색163이 아니고 생명이었을까? ‘생태’가 아니고 ‘생명’이었을까? 역시 대답은 ‘몸-생/명’의 감각이다. 체험에서 비롯된 어떤 느낌, 그리고 깨달음이다.
--- p.174
체험은 항상 내적 변화를 동반한다. 그러나 성찰만으로는 자신도 세상도 바꿀 수 없다. 그것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고 자라고 소통되기 위해서는 어떤 ‘형식들’을 가져야 한다. 하나의 사건으로 경험되기 위해서는 폼, 즉 형식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 p.178
40년 전 생명운동가들은 “전일적 생명의 세계관의 확립과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조”하고자 했다. 그것이 곧 생명운동의 사명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창조할 것은 생활양식만이 아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세계관부터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삶의 다양한 형식들을 발명해야 한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이념형식, 운동형식, 조직형식, 활동형식 등등.
--- p.184
시민사회와 정치권이 이구동성으로 시민권 혹은 시민성(citizenship)을 강조하고 있으나 ‘몸-생/명’의 관점에서 이는 역설적으로 시민의 에너지와 활력을 억제하는 것이 된다. 시민의식과 시민권에 대한 강조와 제도화를 통해 시민
은 패턴화된 존재, 틀 지워진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시민이라는 ‘주권적 주체’ 이전에 잠재성으로서의 인간 생명이 간과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도 구성된다. 수행적 활동을 통해 형성되고 변성된다. 시/민의 관점을 통해 ‘주권적 주체’, 고정된 주체에 갇히지 않고, ‘카오스 민중’, ‘카오스 생명’의 잠재력에 주목해야 할 일이다.
--- p.195
언젠가부터 우리는 ‘대안’을 탐색하고 ‘대안’을 실현하기 위해 활동했다. 이를테면 대안의 과잉이라고나 할까? 특히 양자택일의 대안(alternative)적 사고는 위험하다. 대안은 이념형 모델일 수밖에 없다. 꿈은 느낄 수 있으나 대안 모형은 느낄 수 없다. 꿈은 체험적이지만 모델은 체험적일 수 없다. 살아 움직이는 ‘몸-생/명’의 역동이 아니라 두뇌의 시뮬레이션 기능, 재현의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대안의 극단적인 형식은 이념이다.
--- p.198
경제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반대한다. 시장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반대한다. ‘자본’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반대한다. 생각해보면, 자본의 숭상을 공동체의 핵심 이념으로, 중심 가치로 삼는다는 것은 생명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 p.222
그렇다. 경제와 ‘몸-생/명’을 재-연결해야 한다. 경제를 재-신체화해야 하고 경제체계와 생명활동이 재-공생화해야 한다. 이때 재-공생화는 과거로 돌아가기가 아니다. 돌아갈 수도 없다. 또 다른 공생의 형식을 발명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때 발명은 항상 ‘재-발명’이다.
--- p.224
사실 생명운동은 항상 ‘생명운동들’이었다.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작지만 봄이면 산과 들에 별무리처럼 피어나는 풀꽃들처럼 ‘생명운동들’은 사라질 수 없다. 또 다른 모습으로 활동 중이다. 나에게는 수많은 ‘페미니즘-운동들’이 새로운 생명운동들이다.
--- p.238
태동(胎動), 탄생의 움직임은 이미 감지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의 대전환은 방향바꾸기만이 아니다. 대전환은 또 다른 세계들의 태동이다. 그리고, 탄생은 고통과 함께, 기존 질서의 붕괴와 함께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다시, 생명은 ‘생/명’이다. 개벽은 ‘개/벽’이다.
--- p.245
지금까지의 진보적 사회운동이 ‘생각의 운동’이거나 ‘재현적 모델의 운동’이라면 페미니즘은 ‘느낌의 운동’, ‘살아있는 삶의 운동’이다.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인간을 경험케 하는 운동이다.
--- p.247
때가 왔다. 우선 ‘다시개벽’ 서사를 다시 써야 한다. 이번엔 ‘생/명’이 아니라 ‘개/벽’이다. 기존의 개벽담론을 다시 보고, ‘생/명’ 관점에서 다시 쓴다. 또 다른 개벽담론의 발명을 연습한다.
--- p.256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이제 생명운동은 스스로 살아있고, 서로 살아있고, 사회적으로 살아있는 생명공동체 만들어 경험하기이다. 생명의 약동을 체험하고 나누는 일이다. 그리고 생명의 약동은 사람들끼리만이 아니라 집 안에서의 반려동물, 숲길을 걸으며 만나는 꽃과 나무들과 이미 연결되고 있다. 생명공동체는 이미 도래한 우리의 삶이다. 우리는 이미 느끼어 반응하는 감응(感應)의 공동체, 이미 마음이 오가는 정동(情動)의 공동체를 살고 있다. 이때 생명운동이란 이러한 생명공동체라는 또 다른 사회적 형식 만들기이다. 이때 ‘전환적 생명운동’이란 무엇보다 ‘도래할 기쁨의 예감’을 사회화하는 일이다.
--- p.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