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들면 눈에 가득 들어오는 동네 풍경. 옥상 한가운데 삼촌이 돗자리를 깔고 벌러덩 누웠다. 골목에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고 까만 하늘에 점점이 뜬 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 더 많이 내 눈에 들어와 박힌다. 쏟아지는 무수한 별 중 보석 같은 내 별 하나 찾아내어 온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순간. 그 영롱한 신비로움은 내 안에 또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냈다. … 그날 옥상에 누워 바라본 밤하늘은, 별빛은, 우리 모습은 그렇게 아름답게 내 삶에 수놓아졌다. 별이 빛나던 여름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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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도 여름에도, 겨울을 향해가는 가을에도 자연은 급한 것이 없다. “익어가는 것들은 숨 가쁘게 달리지 않는다”고 박노해 시인은 가을을 노래했다. 노란 잎도, 촘촘한 열매도 이내 떨어져 이리저리 나뒹굴다 흔적만 남겠지만,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람을 느끼는 나무는 의연하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자연은 서로를 부러워하거나 비교하지 않는다. 그저 제 생긴 그 모습대로 잘 익어가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걸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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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시간이 지나야만 뒤늦게 깨닫는 것들이 있다. 외할머니가 계실 때보다 할머니 생각이 더 난다. 할머니. 할머니가 함께하며 주신 많고 좋은 것들이 제게 있어요. 잘 계시지요. 어느덧, 봄이 오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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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만들기에 빠져 볼이 발그레해진 아이를 붙들고 느슨해진 목도리와 옷매무새를 단단히 만져주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의 두 눈은 행복감으로 가득 차 있다. 눈밭에서 아이들이 꽃처럼 피어오른다. 욕심을 품어서는 안 되는 존재, 존재 그 자체로 커다란 선물인 아이들. 이 소중한 존재를 눈밭에서 자라는 꽃망울 보듯 오늘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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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했던 골목길이 사라지면서 그 안에 있던 이야기도, 추억도 함께 사라지고 우리에겐 진한 그리움만 남게 됐다. 어차피 우리 삶은 시간과 함께 변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잃고 난 뒤에, 지나고 난 뒤에 후회하며 살기엔 인생이 참, 짧다. 그 많던 골목을 그리워하며 맑은 날의 골목, 비 오는 날의 골목을 그렸다. 그림 속에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추억을 녹여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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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환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그날의 햇빛, 공기, 아이들의 왁자한 소리. 수업이 끝나고 썰물처럼 빠져나온 아이들은 운동장, 동네 공터, 문구점 오락기구 앞, 친구네 집으로 흩어져 오후를 보냈다. 봄기운이 무르익을 때면 학교 정문 앞에는 우리를 맞아주던 분들이 있었다. 병아리가 가득 든 상자를 자전거에 실은 아저씨도 계셨고, 군침 도는 달고나 냄새로 우리 발길을 붙잡던 뽑기 할아버지도 계셨다. 머리핀과 방울, 머리 끈으로 좌판을 펴시던 아줌마도 생각난다. 특히 나는 곱고 화려한 인형 옷과 손가락이 쏙 들어가는 구두, 가방, 머리빗을 보자기 위로 펼쳐놓으신 할머니를 언제나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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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재래시장에 갔다가 어릴 때 갖고 놀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인형을 반가운 마음에 사 왔었다. 하늘색 목욕통에 담긴 아기 인형 옆에는 옛날과 꼭 같이 우유병과 머리빗도 들어 있었다. 인형은 진즉에 우리 집을 떠났고 목욕통만 화장실에 두고 청소용 솔을 넣어두고 쓰다가 최근에 깨진 걸 보고 미련 없이 버렸다. 물건들이 하나하나 추억을 남기고 떠나간다. 샤워기를 틀어 아이들 머리 위에 비누 거품을 깨끗이 씻어내자, 꾀죄죄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보송보송한 천사들이 되었다. 마음 안에 쌓인 삶의 찌꺼기도 이렇게 씻어내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내 안의 찌꺼기를 청소해준 건 바로 이 순간이다. 말간 얼굴로 웃는 나의 딸들.
--- p.118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남편은 눈썹도, 눈도, 입도, 마음도, 처져가는 볼살마저도 얼굴 맨 위로 올라가 있는 것 같다. 눈 쌓인 새벽 출근길도, 눈치 보며 하루를 버티는 고된 사회생활도, 때때로 찾아오는 길을 잃어버린 듯한 쓸쓸함도 모두 견뎌낼 힘, 가족. 두고두고 생각나겠지. 오늘 이 순간이.
--- p.145
결혼하고, 아이 낳고 부모가 되어 점점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와 할머니를 여자로, 부모로, 사람으로 아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이따금 생각과 행동이 따로 움직여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이 오가기도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를 이해해주는 관계. 엄마에게 한없이 퍼주기만 하는 사랑을 나 역시 보고 배웠으니 나도 그런 엄마가 돼야 할 텐데…. 엄마는 할머니에게, 나는 엄마에게, 내 딸들은 나에게, 그렇게 서로를 보며 우리는 자란다.
--- p.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