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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술은 너무 슬퍼서

시인동네 시인선-203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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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5월 08일
쪽수, 무게, 크기 124쪽 | 182g | 125*204*20mm
ISBN13 9791158965914
ISBN10 115896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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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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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벌건 대낮
누군가의 눈부신 눈물이었을 겁니다
벌 나비 햇살 끌고 와 바람 넣어도
얼굴만큼은 보여줄 수 없다고 절절 흔들어댈 겁니다
태양이 머리통 지글지글 달궈도
장대비가 사정없이 온몸 후려갈겨도
칭찬하는 바람 욕하는 바람 제멋대로 불어도
무럭무럭 동요되지 않을 겁니다
그저 묵묵히 몸만 지탱하다가
저녁노을 끌어 덮은 겨드랑이에서
노랑나비 같은 노오란 꽃 팍팍 피워댈 겁니다
지나는 구름들에게 방긋방긋 웃기만 할 뿐
외롭다 무섭다 하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아픔 없이 피운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꽃이란 또 얼마나 슬픈 벼랑입니까
절망해본 사람은 알 겁니다
두려움 가슴에 안고
잠 꼿꼿이 세운 채 기다리는
노란빛 숨결로 달님과 정겹다가도
날 새면 꼼짝없이 그리움에 묶여버린다는 것을
---「달맞이꽃은 아침을 두려워하고」중에서

평상 위에 투두둑 둑,
검은 꽃 피우는 물꽃들의 애환
어쩌랴, 시마를 부를 수밖에

손가락 끝에 접신 되어도
언어는 바로 쏟아지지 않는다

폴더에 대기 중인 녀석들
하나하나 호명
육근에 접목되어 엉켜 있는 놈들의 뼈를 깎는다

복잡한 인생들 대기 라인에 세우고
가벼운 인생들 날이 밝아서야 집으로 돌아간다

다래와 머루 등속 솔바람 타고 와 새벽을 위로한다
그래도, 언어는 손가락 끝에 접신되지 않는다

새벽안개 짙으니
매미는 하릴없이 울어댈 것이고
오늘도 낮은 펄펄 끓을 것이다
---「퇴고」중에서

질경이는 혁명의 전사다
버려진 땅을 자신의 영토로 개간하는

작고 여린 꽃
어머니의 심장 같다

질경이 닮은 사람들
스스로 길을 내는,
고달프지만 절대 영혼 꺾지 않는,
이 땅의 비주류들이다

오늘도 혁명 중이다
땅 파고 공장 돌리고 자동차 고치고
하수구 뚫고 빵 굽고 밥 짓고
똥 푸고,
그리고 또, 작고 여린 꽃을 피우는
이 땅의 질경이들
---「비주류들」중에서

잿빛 소음 가득한 도심의 한복판에서
다 된 밥그릇 받아들고 강원도 홍천으로 귀향
겨울 볕 바르고 바람 얌전히 쉬어가는
봉화산 자락에 터 잡은 지 9년

멧돼지처럼 산전과 산비탈에 엎드려
내 살 긁듯 벅벅 긁을 때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건더기들
육근(六根)으로 발기시켜 수박씨 뱉듯 퉤퉤 뱉는다

밤, 대추, 고야, 머루, 두릅, 엄나무……
생에 얽힌 사연들 시마(詩魔)에 걸려
깜깜하게 언 땅 쨍쨍 풀리는 줄도 모르는

삼월이, 불쑥 찾아와 살갑게 달라붙어
일일일야(一日一夜)만이라도 동주하자고 강짜 부리는
네모나고 뾰족하고 맵고 쓰고 시고 짠
놈들, 끌어안은 팔만사천 톤의 감각
육경(六境)으로 버무려 시를 짓는다

문 밖 헛기침 소리 고요에 들고
댓돌에 걸터앉아 푸르게 출렁이는 달빛과 어우러진
그림자들의 맥박 소리로 지지는 된장찌개
보글보글 뿜어내는 시의 향기
쿵쾅쿵쾅 내 심장 뛰듯 바람 박차고
팔라당팔라당 여행을 떠난다
---「시 캐는 농부」중에서

목화송이 같은 미소 무럭무럭 쏟아붓는,

고양이가 번개 치듯 눈송이 잡으려
소리 없이 버럭 눈 찢게 하는,

거기에다 오똘랑오똘랑 허공 찢어대는
누렁이에게 하이얀 숄 포근히 감싸주는,

산수유꽃 불두덩에도 살포시 내려앉아
새하얗게 웃어주는,

모닥불로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하는,

봄과 봄의 반 뼘 사이에서

낮술은 너무 슬프다
---「낮술은 너무 슬퍼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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