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필요한 단어가 없으면, 다른 사람의 고급 언어 공격을 받아칠 수도 없고 세상을 이해할 수도 없고 내 생각을 표현할 수도 없어 위태롭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필요한 단어가 무엇인지, 그 단어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단어가 ‘엄연하다’라는 사실을 그 단어로 얻어맞기 전에는 몰랐던 것처럼.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전이 있다.
---「단어의 힘」중에서
나는 당장 읽지도 않을 책들을 사서 책꽂이에 꽂아놓는 것도 좋아하는데, 책을 일종의 외장 메모리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머리에 꽂으면 내 지식이 되는 메모리스틱처럼 여긴다. 그중에서도 모든 지식을 집대성한 사전이 집에 있다면, 테라바이트급의 메모리스틱을 갖고 있는 셈이니 얼마나 든든한가(언제 머리에 꽂을지는 알 수 없지만).
---「단어의 힘」중에서
우리는 사전이 있으면 스크래블도 할 수 있고, 예문을 가지고 짧은 이야기도 만들 수 있고, 도서 암호를 만들어서 친구에게 보낼 수도 있다. 그리고 사전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는데, 사전의 ‘배’ 에 해당하는 부분을 비스듬히 기울어지게 펼친 다음 쓰다듬어보라. 꽃종이처럼 얇은 종이가 촘촘히 겹쳐진 사전 옆면을 만지면 마치 고양이 이마를 만질 때처럼 만족스러운 느낌이 든다. 살살 긁으면 가르랑거리는 소리도 난다. 나처럼 고양이가 없는 사람도 “종일 키보드 근처에 드러누워 가르랑거리는” 사전은 키울 수 있다. 내 고양이의 이름은 ‘웹스터’다.
---「사전은 고양이로소이다」중에서
논리와 기억과 언어를 잃어가던 아버지는 정말 엉뚱하게도 그리스어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도였는데, 사도들의 복음을 처음 언어로 기록할 때 쓰인 언어인 코이네 그리스어를 배워서 최초의 언어로, 번역으로 훼손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성경을 읽고 싶다고 했다. 원래의 의미, 태초의 의미를 찾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기묘하게 생긴 그리스어 알파벳을 노트에 옮겨 적고 날마다 외웠다. 언어를 잃어버리는 병에 걸린 아버지는 날마다 단어를, 생각을 놓치고 있으면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려고 했다.
---「아버지의 사전」중에서
사전 편찬은 완벽한 엄밀함을 추구하지만 정의상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 없는 일이다. 사전 편찬자들은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 산이 계속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다. 완벽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은 사전뿐 아니라 인간이 하는 모든 노역의 공통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완벽한 조형물은 쇠락하고 완벽한 이론은 반박된다. 시간의 흐름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허황한 노력을 기울여 불가능한 완벽에 도전하는 사람이 없다면 문명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a부터 zyxt까지」중에서
사전에 나와 있는 정의는 가능한 한 건조하게, 기름기를 쫙 빼고, 집필자의 영혼이나 존재, 삶의 흔적이 담기지 않도록 애써서 쓴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단어를 사람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뜻으로 여길 수도 있고, 그 단어를 보며 사전에는 기록되지 않은 어떤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어떤 단어들은 뜻을 피상적으로만 알았다가 살면서 어느 순간 처음으로 경험하고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떠올리게 되기도 한다. 사랑이라든가, 외로움이라든가, 노화라든가, 다리에 쥐가 나는 것이라든가. 경험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이다.
---「내 마음속의 사전」중에서
어릴 때 특정한 곳에서 접한 단어는 처음 보았을 때의 맥락, 느낌, 분위기가 함께 떠오른다. 신기료장수, 능금, 아가위, 아교, 아마포, 축음기… 이런 말들은 어릴 때 동화책에서 봤는데 실제 생활에서 접한 적은 없는 말이니까 내가 어릴 때도 이미 화석이 된 단어들이다. 여기 적은 것보다 훨씬 많은 말들이 있었을 텐데 잃어버렸고 이제 다시는 찾을 수도 없어서 너무나 아깝다. 어릴 때는 곧잘 썼지만 이제는 쓰지 않는 단어 도 있다. 양옥집, 혹성, 지남철, 소독저, 사진기, 복덕방, 세숫대야, 구멍가게 등은 이제 사라져서 잘 쓰이지 않거나 부적절해졌거나 다른 단어로 대체된 단어들이다. 죽은 단어들.
한편 나에게 ‘빼다지’ 라는 말은 아버지의 잡동사니 물건이 가득 들어 있던 서랍을 떠올리게 하고, ‘덕석’ 이라는 말은 어릴 때 겨울이면 코끝이 시릴 정도로 추운 집에 살 때 엄마가 손뜨개로 떠준 연초록색 조끼를 소환한다. 감정적 기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단어들. 그러니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정의가 가득 쓰인 사전, 요즘 쓰는 말과 알고는 있지만 이제는 쓰지 않는 말, 나만 아는 것 같은 말, 좋아하는 말과 싫어하는 말이 담긴 사전을 하나씩 가슴에 품고 있는 셈이다.
---「내 마음속의 사전」중에서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나는 집 안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화장실에 휴지 채워 넣기, 다 떨어진 생필품 사놓기, 쓰레기 버리기, 구석구석에 앉은 먼지 닦기 등)을 드높이는 장려한 단어가 있었으면 좋겠다. 또 내 마음속에 늘 어지러이 떠다니는 감정을 딱 집어 고정해놓을 단어도 있었으면 좋겠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돕고 싶은데 용기가 없어서 돕지 못하고 마음에 남은 짐, 누군가를 현실에서 만났을 때보다 꿈에서 만났을 때 더 반갑고 애틋한 현상, 예전에 내가 저지른 어떤 실수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늘 지금의 일처럼 떠오르는 것 등. 그런 마음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쓴다면, 나만 그런 것은 아니구나 생각하고 안심이 되기도 할 것이다.
---「내 마음속의 사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