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한 종류의 표시와 소리가 의미를 지닌다는 것, 우리 인간이 이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철학적 의미 이론은 표시나 소리의 문자열이 유의미하다는 것, 특히 문자열이 어떤 효능으로 독특한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해야 한다. 인간이 별다른 노력 없이 유의미한 발언을 만들어내고 이해하는 일이 어 떻게 가능한지도 설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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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이론에 제기된 마지막 반론은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 우리가 주목했듯 러셀은 자신이 정관사 ‘그(the)’의 핵심적 사용이라고 간주한 것만 다루고, 복수 용법과 일반 용법을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이는 확정 기술 이론을 언제까지나 애지중지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쨌든 러셀은 맥락 사용을 언급하지 않는다. 기술 이론에서 왜 맥락 사용을 다루지 않는지 의아한데, 기술의 복수 용법과 일반 용법은 단칭 표현이 아니지만, 맥락 기술은 표면적으로 단칭 지칭 표현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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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립키는 어떤 이가 ‘닉슨’이라는 이름을 이 세계에서 한 사람을 지칭하려고 사용한 다음에 그 이름을 계속 사용하면서 가상의 각본이나 대안 가능 세계(hypothetical scenarios or alternative possible worlds)를 기술한다면, 그 사람은 같은 사람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여러분이 “닉슨이 대통령이 되지 않고 흑표범당에 합류했을 수도 있을까?(Might Nixon have joined the Black Panthers rather than becoming President?)”라고 물으면, 대답은 ‘그렇다’일 수도 있고 ‘아니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고려한 각본은 바로 그 사람, 닉슨이 흑표범당의 당원이라는 것이지,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가 흑표범당의 당원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은 흑표범당의 당원이 미국의 대통령인 세계를 상상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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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영국의 여왕은 대머리다. 2017년에 우리는 엘리자베스 윈저가 러셀의 충고에 따라 가발을 쓰지 않았다고 가정하면서 (1)은 거짓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대머리였을 수도 있거나 대머리가 될 수도 있는, 과거나 미래의 다른 여왕들에 대해서 는 어떤가? (1)을 대머리였던 어떤 선대 여왕의 재임기에 발언했다면 참일 테지만, 지금부터 수십 년이 지나 어떤 후대 여왕의 재임기에 발언하면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그래서 (1)이 거짓인지 참인지는 언제 발언하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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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이스(Herbert Paul Grice, 1913~1988)는 언어 표현이 오로지 표현이기 때문에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언어 표현은 명제를 ‘표현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리고 문자 그대로 언어 표현을 사용한 사람의 어떤 구체적인 생각이나 의도를 표현하기 때문에 의미를 지닌다. 그라이스는 ‘화자 의미(speaker-meaning)’라는 생각을 도입했다. 어림잡아 말하면 화자 의미는 화자가 특정한 기회에 주어진 문장을 발언할 때 청자에게 전달하고자 의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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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는 한밤중에 구운 빵에 버터를 발라 먹었다”는 참이다 iff (∃e)(버터바름(e) & 주인공(존스, e) & 희생물(구운 빵, e) & 발생-때(e, 한밤중)) 이 T-문장의 오른쪽 항은 흔히 다음과 같이 읽는다. “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은 구운 빵에 버터를 바름이었고, 존스가 한밤중에 수행한 것이었다.” 데이비드슨은 행위자인 존스가 아니라 전체 사건을 바탕에 놓인 주어로 만듦으로써, 왜 표적 문장이 “존스는 버터를 발랐다”, “구운 빵에 어떤 일이 벌어졌다”, “한밤중에 어떤 일이 생겼다” 같은 단순 문장을 함의하고, 이 함의들을 달리 포착하기 어려운지 설명할 수 있다.
--- p.244
평서문(declaratives)은 다른 효력도 역시 가지면서 발언할 수 있다. 만일 내가 (9)~(12)에서 각각 수행 어구를 삭제하고 단지 “우리가 … 을 지나치게 확장한다”, “위원회는 … 에 투표했다” 따위로만 같은 맥락에서 말한다면, 그런 발언은 각각 판단, 보고, 충고, 경고의 효력을 가질 것이다. 오스틴은 이런 유형의 특징을 ‘발화 수반 효력(illocutionary force)’이라고 불렀고, ‘발화(locutionary)’ 내용이나 명제 내용과 대조했다.
--- p.311
은유에 관한 주요 철학적 문제는 두 가지다. 넓게 해석한 ‘은유적 의미’란 무엇인가? 그리고 은유적 의미는 어떤 기제(mechanism)로 전달되는가? 다시 말해 청자들이 들은 것이 문자에 충실한 의미가 다른 어떤 문장일 뿐이라면, 청자들은 어떻게 그런 의미를 파악하는가? 은유는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대신에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이유, 비유 화법으로서 은유의 독특한 효과와 힘, 삶의 몇 가지 방면에서 은유가 하는 중심 역할에 관해 중요한 철학적 문제를 여러 개 추가로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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