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엄마, 나 그냥 진짜 할머니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들어 줘요. 딸이 하나랬지? 애 이름이 뭐예요?”
“율이예요.”
“그렇구나. 그럼 지금부터 딸 하나 더 키운다고 생각하고 나를 돌봐요. 율이가 첫째고, 내가 막내딸이라고 생각해요. 율이보다 나를 더 먼저 돌봐줘요.”
“네, 꼭 그럴게요.”
“그리고 절대 주변 사람들한테 괜찮다고 하지 말아요.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 해. 남한테 내가 100퍼센트 잘해 주면, 그 사람이 고마워할 것 같지? 아니에요. 95퍼센트만 돼도 서운하다고 해. 남한테 애쓰지 마요. 지금은 우선 나한테만 애써요.”
--- p.47
나를 대하는 근심 어린 얼굴들을 보고 깨달았다. 상대방이 걱정될수록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게 먼저라는 걸. 갯벌에 숨은 조개를 찾듯 마음속에서 진심을 캐낼 필요는 없다. 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그대로 둔다. 우선은 그 사람이 보여 주고 싶은 만큼만 믿어 주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만큼만 들어 주면 된다.
--- p.87
내 나이에 아픈 부모님을 돌보는 건 ‘효녀’ 소리 들을 일이지만, 내 나이에 환자가 되면 부모님께 걱정만 끼치는 ‘불효녀’다. 나는 젊어서 암에 걸린 게 잘못이라고, 이 나이에 남들은 다 건강한데 너만 왜 그리 나약하냐고 자책했다. 아무렇게나 던진 돌에만 개구리가 맞아 죽는 게 아니었다. 내가 약한 개구리이기 때문에 꽃으로 맞아도, 풀에 스쳐도 쉽게 상처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를 탓했다.
--- p.120~121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시장에서 받아온 리플릿을 보다가 어쩌면 내 삶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함도 예술의 일부이듯, 아픈 것도 내 삶의 일부다. 나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서 오랫동안 외면했다. 젊으니까 건강하고, 활동적이고, 생산적이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픈 내가 비정상이라고 마음대로 결론 내리기도 했다. 환자의 반대말이 정상인이니까 아픈 나는 일반적이지 않다고 여겼었다.
--- p.141
객관적인 불행은 없다. 영화 속 치매 환자가 부러워한다고 해서 암환자인 내가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나보다 더 위독한 암환자가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해서 내 슬픔이 덜어지지는 않았다. 이제는 내 고통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의하지 않는다.
그저 힘들 땐 나의 슬픔과 분노, 고통과 절망을 알아차리려 노력한다. 누구와 비교하지 않은 순수한 내 감정을 향해 ‘많이 힘들었구나.’ 하고 다독여 준다. 남에게 내 마음을 설득하려 하지 않고 그저 보듬어 준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니까. 다행이라고 억지 부리지 않고 내 편이 되어 준다.
--- p.154~155
나무의 단면을 잘라서 얼마나 컸는지 나이테를 확인할 수는 없다. 억지로 잡아당긴다고 자라는 것도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이도 나도 나무처럼 성장하고 있다. 각자 제 속도에 맞게 자란다. 매뉴얼 없이, 느리지만 분명하게 식물처럼 자란다.
--- p.185
“나는 안 죽고 싶어. 엄마도 안 죽었으면 좋겠어. 나는 죽는 거 싫어.”
“그런데 그럴 수가 없어. 누구나 다 죽어. 엄마가 비밀 하나 더 알려 줄까? 사람들은 자기가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몰라.”
아이는 곧 울 것 같았다. 겁에 질린 아이를 안아 주면서 책장을 가리켰다.
“봐봐. 어떤 책은 엄청 두껍고, 어떤 책은 얇지? 율이가 좋아하는 이 그림책은 얇지만 재밌잖아. 그리고 저건 두껍지만 지겨운 책이고. 사람도 책과 마찬가지야. 짧게 살아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지만, 오래 살아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있어. 물론 두껍고 재밌는 책이면 더 좋겠지만 말이야.”
“나는 두껍고 재밌는 책 할래. 엄마도, 아빠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우리 가족 다.”
“그건 우리가 선택할 수 없어.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야. 오늘을 재밌게 사는 거. 매일 즐거운 이야기로 채우는 건 우리가 할 수 있어. 하지만 책 두께는 못 정해.”
--- p.203~204
암을 이겨 냈다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암투병, 암과의 전쟁 같은 말도 함께. 투병(鬪病)이란 병과 싸운다는 뜻이다. 싸움은 결국 어느 한쪽이 이기고, 한쪽이 지는 게임 아닌가? 투병이라고 하면 치열하게 싸우고 상처 입는 것이 환자의 숙명이라는 의미처럼 느껴진다. 암과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결국 누군가 다치고 죽는 결말일 게 뻔하다. 그러니 아픔과 싸우는 게 아니라 치유해야 한다. 아픔을 다독이며 살아야 한다.
--- p.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