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항상 인간들은 그렇게 무리를 할까. 하루에도 수십수만 건씩 불행뿐인 뉴스로 도배되는 세상인데 왜 자기만은 그런 불행이 피해 갈 거라며 행운을 확신할까. 다시 한번 느끼지만, 경솔한 인간은 위험한 결정을 늘 참 쉽게, 그리고 너무 서둘러 내린다.
--- p.149
‘여보세요.’
평소 너무 흔해 지루하기까지 한 이 네 글자를 어서 내보내야 하는데, 내 목에서, 내 입에서, 입술을 열고 나가지 못한다. 어서 ‘여보세요’라고 해야지. 엄마잖아. 내 속에선 어서 입을 열라고 계속해서 명령해 댔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딸?” 오히려 엄마의 목소리에 물든 이 한 글자가 먼저 내 귀에 닿고, 그리고 내 머리로 쑤욱 올라가는가 싶더니, 한순간에 내 심장으로 곤두박질쳐 내 마음을 세게 때린다. 그래 딱 그 한 글자가. 그렇게 내 마음에 닿은 그 한 글자는 마치 바닥을 향해 세차게 내던져진 공이 다시 위로 튀어 오르듯, 마음에서 다시 머리 위로 솟구치는가 싶더니, 내가 뱉어야 했을 말을 순식간에 내 안에 쏟아낸다.
--- p.175
운명은 끊임없이 우리 인간을 시험하고, 갖고 놀고, 이리 던지고, 저리 날렸다, 미치게 했다, 울게 했다, 그렇게 흘려보내다, 어느 순간 다시 우리를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운명에 휘둘린 어리숙한 인간은 그것이 제자리라 믿고 그저 다행이라 생각하며 다시 하루를 살아가지만, 운명은 말한다. 그것이 운명이라고. 다 똑같아 보이지만,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그것이 운명이고, 너희 인간은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라 비웃는다. 아, 물론 그토록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가련한 누군가에겐 운명도 대놓고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다. 운명은 다시 말한다.
그것 또한 운명이라고.
--- p.202
〈당신이 찾는 것이 당신을 찾고 있다〉
화면을 너무 가까이 들이밀길래 아직 나 노안 안 왔다고 반항해 보려는 내 눈동자에 손녀가 들이민 글자들이 선명하게 박혀 들어온다. 그리고 이어서 내 귀에 꽂히는 손녀의 한마디.
“그러니까 할머니가 찾아야, 할머니가 찾는 것이, 할머니를 찾을 수 있는 거야. 알았지?”
다시 한번 느끼지만, 요즘 애들은 참 빠르다. 세월을 훨씬 오래 살아온 나보다 더.
--- p.232
“선생님, 내 차례 안 됐어요? 접수한 지 오래됐는데...”
“선생님, 나 제주도에서 왔어요. 이따 4시 비행기 타고 돌아가야 해요. 나 좀 먼저 놔줘요... 응?”
“색시... 나 얼른 가서 영감 밥차려줘야뎌... 강원도 가는 기차 놓치면 안되는디... 여기 싸대서 왔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구먼.. 몰래 나 좀 먼저 놔줘. 그럴 수 있자녀, 응?”
“제발 주사 좀 놔주세요... 선생님... 너무 아파요...”
“아,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 하! 벌써 3시간째 이러고 앉아있네. 이거 좀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옥은 지금 텅 비어있대. 여기가 지옥이라.〉 나는 그곳에서 왜 이 말이 생각났을까? 과연 저 수많은 질문, 아니 원성들에 누가 답을 할 수 있을까. 꽤나 오랫동안 신은 아무 응답을 주지 않았다. 마치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아니, 어쩌면 이제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 p.272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미친놈. 당신, 신 아니었어? 근데 뭐라고? 지금 이 신이, 아니 이 의사 새끼가 나한테 뭐라고 한 거지?
“미친놈. 그게 할 소리야? 그게 할 소리냐고!!!”
나는 미친놈이라 말했지만 정작 내가 미친 것처럼 소리쳐대기 시작했다. 이내 내 딸이었어도 분명 이렇게 소리쳤을 거다. 아니 어쩌면 사자처럼 이 능력 없는 신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버렸을지도 모르지. 5시간의 내 기다림이 신이라 믿었던 은테 의사의 마지막 말에 부서지고, 나도 그렇게 무너져 내린다. 제발 내가 잘못 들었길, 이 의사 놈이 착각해서 잘못 말했길 바라는 눈으로 의사를 한 번 더 빤히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잿빛 속 신은 여전히 내게 내 딸의 죽음을 준비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 p.322
어떻게 하면 저렇게 아무 감정도 못 느끼는 것처럼 살 수 있을까. 그래도 같은 사람인데, 굳이 애 앞에서 꼭 그 말을 뱉었어야 했을까.
〈아마도 선은 악이 아닐까? 사실 신은 악마의 발명품일 뿐인 거지. 악마가 자기를 더욱 고상하게 보이려고 만든 그런 거〉
언젠가 누구한테 들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 이 말이 그들의 날 선 하얀 가운 뒷모습에서 떠오른 건 왜였을까?
--- p.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