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이든 양옥이든 화장실은 모두 실외에 별도의 작은 건물을 세워 만든, 이른바 푸세식이었기 때문에 골목을 걸어가노라면 여름에는 특히 냄새가 심했다. 화장실엔 환기를 위한 작은 창이 골목으로 나 있어서 용변 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이 두 번째로 세 들어 산 집이 있던 동네에는 근처에 기찻길이 있었는데, 등하교 때 이 기찻길을 건너야 했다. 특별하게 안전 펜스 같은 것도 없어서 사실 꽤 위험했다. 행복하게 느껴지는 ‘기찻길 옆 오막살이’란 없었다. 기찻길이 아니더라도 대충 만든 벽돌담이나 가시가 무성한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친 집도 있었고, 구멍가게가 두세 개쯤 있는 골목을 지나야 해서 불량식품의 유혹에도 그대로 노출되었다. 특별히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유형무형의 보호장치가 없던 시절이었다.
---「강릉 그 바닷가의 추억: 친척들과 여름 나기」중에서
소년 잡지는 장난감 이외에도 세상과 교류하는 특별한 통로였다. 세계 몇 대 불가사의라든지, 세상의 기괴한 사건이라든지, 또는 일반 책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해외 토픽’ 같은 다양한 형식으로 전해져서 소년들 사이에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그러니까 소재는 빈약했어도 요즘의 유튜브 같은 것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TV 다큐멘터리의 주요 소재인 피라미드의 비밀, 버뮤다 삼각지대의 비밀 그리고 흡혈귀 드라큘라의 유래 같은 미스터리 이야기뿐 아니라 오로라 이야기, 자동차 왕 포드 이야기, 비행선을 만든 체펠린 이야기, 히틀러 이야기 등을 모두 이 잡지들을 통해 처음 들었다. 특히 21세기를 상상하는 이야기에서 21세기가 되면 사람들이 모두 손에 화면이 나오는 전화기를 들고 다닌다는 내용을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그런 상상력이 과학보다 더 빠르고 더 현실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어느샌가 깨달았던 것 같다.
---「소년 잡지」중에서
아버지의 첫 번째 신문물은 TV였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그때는 아직 TV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철암에서 셋방살이를 하던 시절, 우리는 물론이거니와 주인집에도 TV는 없었다. TV가 몇 집마다 하나씩 있을 정도로 귀해서 우리는 교장 선생님 댁에 모여 TV를 보곤 했다. 보다가 졸고 있으면, 어머니나 아버지가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다. 생각해 보니 그 교장 선생님 댁 식구들로서는 우리가 꽤 성가셨을 텐데 특별히 불편한 기색을 보이시진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가족이 매번 그곳에서 TV를 보고 돌아오는 일이 마음에 안 드셨는지 어느 날, 금성 TV를 사 오셨다. 셋방 살던 우리에게 TV라니!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내가 볼 만한 것은 별로 없었지만, 이제 주인집도 우리 집에 TV를 보러 오곤 했다.
---「아버지가 신문물을 접하는 법」중에서
당시엔 백색 전화와 청색 전화라는 것이 있었다. 전화기의 색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전화번호를 개인이 소유하느냐 혹은 리스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소유하면 이사 갈 때 그 번호를 가지고 갈 수 있지만, 리스라면 번호를 반납하고 새로 받아야 했다. 당연히 소유하는 백색 전화는 가격이 비쌌고, 일반인은 대부분 리스인 청색 전화를 보유했다. 그런데 전화기의 색깔이 실제로는 흑색이 많았기 때문에 흑색 전화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리 집도 당연히 흑색 전화였다. 전화번호는 국번 없이 네 자리인 6971이었고, 전화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냉장고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혁신을 가져왔다.
---「아버지가 신문물을 접하는 법」중에서
만화영화도 열심히 보러 갔다. 가장 기억이 나는 영화는 물론 〈로보트 태권V〉다. 〈로보트 태권V〉는 뭐랄까 약간은 식상한 레퍼토리일지도 모르겠다. 엔지니어인 내 또래의 회사 동료 중에는 〈로보트 태권V〉를 보고 과학기술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는 분들이 제법 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로보트 태권V〉는 극장이 아닌 시민관이란 곳에서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민관은 마치 서울의 세종문화회관같이 강릉 시민들을 대상으로 영화도 보여주고 공연도 하는 곳이었다. 고개를 들고 스크린을 통해 우러러보았던(?) 로보트 태권V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로봇에 깊이 빠졌고, 로봇으로 싸움을 하고 로봇으로 우주로 나가곤 했다. 태권V와 마징가Z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로 진짜 싸움이 벌어지고, 소년지에 새로이 등장한 로봇이 자기 로봇인 양 자랑하곤 했다.
---「강릉의 극장 이야기」중에서
나는 꽤 쌀쌀했던 그날, 그 프라모델 가게 안에서, 그 자동차를 갖고 싶어 애가 타던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해주셨던 아버지를 기억한다. 나는 아버지가, 좀 할인이 안 되겠냐고 물어보시고, 낡은 외투 안쪽에서 봉투를 꺼내 다시 세어보시던 그 만 원짜리 돈다발을 선명히 기억한다. 그렇게 철이 없던 아이를 위해 당시 한 달 월급 수준이었을 그 큰돈을 쓰셨던 날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셨고, 어머니한테 잘해드리라고 말씀하셨던 것도 기억한다. 어머니는 끝까지 반대하셨는데, 금액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들에 대한 기대로 그 큰돈을 쓰셨던 아버지의 기대에 나는 잘 부응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지금도 잘 느껴지며 늘 감사하고 죄송하게 생각한다.
---「아버지의 40만 원」중에서
1980년! 1970년대를 넘어 뭔가 새로운 기대감이 있던 1980년에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당시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정치적인 불안이 전국에 있었을 것이다. 어른들은 느끼고 있었겠으나 초등학생이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었고, 이미 광주에서 저항운동이 있던 시간인 5월 24일 나는 학교 조회에서 통일 글짓기 우수상을 받고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런 가운데 어머니는 서울에서 열린 친척 결혼식에 가셨다. 나는 5월 25일 일요일 뉴스를 통해 광주에서 뭔가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일기에 적혀 있다.
---「일기에 남은 광주민주화운동」중에서
연탄보일러는 그러나 연탄이 연료라서 가을이나 겨울 초입에 어머니는 늘 연탄을 미리 장만해야만 했다. 김장김치를 준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우리 동네 앞에는 ‘대성연탄’이라는 작은 규모의 연탄공장이 있어서 직접 연탄을 배달시키곤 하셨는데, 그 계절에는 모두가 연탄을 배달시켜야 해서 배달 일손이 모자라는 일이 생기곤 했다. 지금도 어머니가 손수레를 빌려서 그 무거운 연탄을 실은 손수레를 직접 끄시던 기억이 난다. 너무 무거워서 앞의 손잡이 부분이 들리곤 했는데, 그렇게 해서 수백 장을 장만하시면 그렇게 안도를 하셨다.
---「연탄보일러」중에서
빨간 새 운동화를 새로 신은 아이를 상상해 본다. 얼마나 기쁜 마음이었을까? 그렇게 신발장에 새 신발을 넣어 두고 수업을 받은 아이는 하교 때에 신발장에서 신발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 후의 일들은 기억에 나지 않는다.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선생님께 알려서 누가 가져갔는지 찾아보았는지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신기한 일이다. 어쨌든 한동안 비싼 신발을 산 일은 없었다. 또 잃어버릴 것을 걱정하기도 했고, 나이가 좀 더 들면서 그런 신발이 그다지 갖고 싶지 않았던 탓도 있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학교에서 없어지는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다들 살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그 신발을 가져갔던 친구가 죄책감 없이 잘 신었기를 소망해 본다.
---「운동화 이야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