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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여백으로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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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5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150*195*15mm
ISBN13 9791188323944
ISBN10 11883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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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조리도 수학이요 과학이자 예술이다. 갖가지 재료의 양, 물의 양, 불의 강약, 조리 시간과 순서가 맞아떨어져야 이름에 맞춤한 음식이 된다. 하찮은 죽 한 그릇도 허투루 되는 것이 없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 p.20

많은 책임과 의무로부터 벗어나 어깨가 가벼워진 지금 나는 또 다시 꿈을 꾼다. 꿈은 젊은이들만의 특권이 아니다. 백세시대를 구가하는 이 시대에 칠십이 대순가, 팔십이 무서운가. 꿈은 생명줄이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던 손에 또 다시 연필이 쥐어졌다. 그 누구도 건드려보지 못한 때 묻지 않은 어휘를 건져낼 꿈을, 누가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진솔한 이야기를 하얀 원고지에 토해낼 무지갯빛 꿈을 꾼다.
--- p.32

사위어 가는 것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수확의 풍요가 무색하게 해 질 녘 만추의 들판에 서려 있던 쓸쓸함, 울고 싶도록 가슴 에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난 아직도 모른다. 나는 그날 아버지의 등뒤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 훔쳤다. 콧등이 시큰한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의 가슴에 각기 다른 명화 한 점씩 새겨 두고 가셨다.
--- p.60

만사에 굳이 정답을 내려고 하지 마시라. 단거리 직선의 정답은 언어의 단호함이 가진 절제와 긴장감의 매력에 반해 다소 공격성을 내포하고 있다. 최소한의 에너지로 최대치의 효과를 창출하는 반면에 잃는 것 또한 많다. 문제 하나에 답은 여러 가지다. 성찰과 이해와 배려 없이 성급하게 뱉어낸 말을 정답이라 할 수 있는가. 삶에 공식이 없으니 정답도 없다. 철칙으로 믿고 살아왔던 나름의 원칙도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더라.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굽은 길로 우회해 보라. 근사치에 가까운 모범답안이 사방에 널려있다.
--- p.95

칠십수 년 다져온 내 의식이 무너지는 데 한나절로 충분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하늘빛에 따라, 햇빛의 굴절과 반사에 따라 바다도 수시로 얼굴색을 바꾼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 변천하는 것이 문화다. 생각의 각도를 조금만 풀면 못 할 것도 없는 일이다. 체격 크고 콧대 높은 미국인들의 포용력, 인간애, 역시 그들은 법보다 사랑을 우위에 두는 통 큰 문화의 소유자다.
--- p.125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편리한 침대를 왜 쓰지 않느냐고. 인체에 가장 과학적으로 접근한 가구, 이불을 펴고 개는 수고까지 덜어주는 침대의 효능을 모르는 바 아니다. 아직은 내 집을 찾는 누군가를 위해 좀 더 많은 공간을 여백으로 두고 싶다. 나의 기다림이 끝나는 날, 거동이 불편하여 무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날, 그날에 빈 공간을 침대에 내주지 않을까.
--- p.159

어스름이 내리고 어둠이 낮 동안의 욕망을 무화시키면 마침내 찾아오는 고요, 내가 내안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하루의 완성에 감사하며 정갈한 이부자리 위에 고단한 몸을 눕힐 때의 충일한 안도감,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다. 낮의 콩쥐가 공주로의 신분상승, 밤의 변신은 내가 한 인격체로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행위이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내일을 향하여 꿈을 엮는 발판이다.
--- p.193

수필은 문학의 속성인 창조와 허구가 허용되지 않는, 경험적 실제 상황이 소재가 되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작가는 사실에 근거를 둔 경험을 날것으로 기록하지 않고 특정한 의도를 투사하여 의미화하고 재창조하는 창작행위를 한다. 사실과 허구, 그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수용하는 고도의 표현력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어느 장르보다 문장의 정확성과 정밀도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수필이다. 읽기에 비해 쓰기는 정작 어렵다.
--- p.203

인간의 신체 부위 중 가장 먼 거리가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한다. 성체를 영할 때마다 못 말리게 쏟아지는 이기적인 기도, 나는 오늘도 영성체 후 내 가족의 안위부터 빌었다. 그럴 때마다 머리와 가슴이, 이성과 감정이 불협화음을 낸다. 그분이 살과 피를 내어주며 우리에게 시사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아마도 절제, 희생, 이해, 용서, 사랑, 이런 단어가 아닐까 싶다. 공동선을 지향하는 낮은 마음, 그것이 그리스도의 향기인 동시에 사람이 사람다워질 때 풍기는 냄새다. 사람 냄새, 진솔한 삶의 향기, 가장 인간다운 그것이 가장 그리스도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 p.223

작은 점 하나가 산이 되고, 한 바가지의 물이 강을 이루는 기적이 오늘도 우리 곁에서 무수히 일어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제때에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심안은 언제나 시간을 숙성시킨 후 뒤돌아볼 때 열리기 마련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고 좋은 결과를 이룩하는 단초가 된 한 바가지의 물, 그것이 마중물이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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